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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물원킨트 May 28. 2024

12월 31일 (2)

2. 일란성 세 쌍둥이


    그 날밤, ‘내일이면 오늘이 하루 전이고, 한 달 전이고, 일 년 전이 된다’는 시답지 않은 농담을 건네며 Y는 전화로 긴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뜨거운 보리차를 마시려던 참에 전화를 받았고, 손가락엔 빈 잔만 덩그러니 걸려있다.


    “오늘 스포츠 뉴스 봤어요? 당신을 떠나버린 그 여자가 뉴저지에 있다고 그랬죠? 오늘은 그 팀이 필라델피아와 경기를 해요. 당신은 어느 팀을 응원할 건가요?”


    “승부의 세계에선 언제나 의외의 일들이 일어나지. 그게 사는 재미라고.”


    나는 동문서답을 하며 '잘 알지도 못하는' 인생 따위를 거들먹거리며 거창하게 대꾸했다.






    “옛사랑에 대해선 대답하지 않는군요?”


    “오늘부턴 대답하고 싶은 것만 대답하면서 살겠어.”


    “냉정한 척하긴. 당신의 그 이상한 태도가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는 걸 알기나 해요?”


    제발 나의 어리석음으로 그대들 아파하지 않기를.


    “여전히 대답이 없군요. 자, 그럼 마지막 질문이나 답을 해봐요. 지난 일 년 어땠어요?”


    나는 대답을 미루며 부엌에서 거칠게 끓고 있는 주전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느 소설가처럼 ‘고통이 나의 자산’이라고 말해볼까. 아니면 과거는 과거일 뿐, 이제는 현재를 살아야 할 시점이라고 쏘아붙일까. 하지만 나는.


    “다 잊었어. 기억 안 나.”


  무책임하게 대답하고 난 뒤, 나는 전화를 끊고 가스레인지를 껐다.






   기억은 위험하다.


   누군가 지나간 일들을 이야기할 때, 틀림없이 거기엔 무엇이 더해지거나 삭제된다는 건 어쩌면 당연하기까지 하다. 기억은, 추억은 사소하고 연약해서 잊히거나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만다.


    하지만 그렇다고 코를 풀고 난 휴지처럼 기억의 꾸러미를 내동댕이칠 수도 없다. 경박하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지금도, 그리고 언젠가 다가올 미래조차도 언젠가는 기억이 되고 말 테니. 결국엔 모든 것은 하나였고, 그것이 바로 삶의 다른 이름이었음이 드러나는 순간은 멀지 않다.

    그러니 추억을, 빈약한 기억력을, 어쩌면 서로 다른 기억을 고스란히 안아줄 수밖에.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시간의 연약한 일란성 세 쌍둥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나는 제야의 종소리를 듣지 않은 채로, 어두운 방에서 눈을 감으며 어느 소설의 누군가의 말을 떠올렸다. 내가 바라는 단 하나는 그것이었는지도.

    인간은 아무것도 안 하고 살 수 없는가.


    참을 수 없는 눈물이 쏟아졌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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