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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가 아홉 개. 구미호에 대한 설명이 그러하다. 1999라는 숫자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구미호를 떠올렸다. 정확히 어떤 연상작용에 의한 결과였는지는 알쏭달쏭하지만 아무래도 아홉이라는 숫자가 주는 요요한 분위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뒤집으면 다른 숫자로 변신하는.
1999년에 나는 스물일곱이던가 스물여덟이던가 그랬다. 그리고 1999년 8월에 지구가 멸망한다는 예언은 믿지 않았다. 그 해 나는 서울에 있었고 91년에서 98년 사이에 세 번의 사랑을 경험했다. 첫 번째 여자는 96년부터 미국에서 살고 있었고, 두 번째 여자는 W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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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일 토요일 오후의 일이다. 청담동의 어느 칼국수집에서 돈까스를 시키고 기다리고 있었다. 유리창 밖으로는 학생들이 하나둘 건너편 학원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출근 시간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아있었다. 고개를 돌려 나는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백화점 서점에서 산 배수아의 ‘철수’였다. 오래전부터 나는 그녀의 소설을 흠모했다.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에서 ‘심야통신’까지. 파격적인 그녀의 문장과 세파에 심드렁한 태도를 훔치고 싶었다.
‘철수’를 읽다가 나는 놀란다. 분명 연천이었다. 군인인 철수의 근무지인 연천 일대는 내 기억의 그곳과 일치했다. 분명히 그녀는 실제로 누군가를 면회하기 위해 그곳에 갔음이 틀림없다. 2년간 5사단에서 복무했기 때문에 알 수 있다. 가보지 않고는 불가능한 묘사였다. 황량한 적막의 도시에 비가 내리면 거리가 잠기고 두 명의 병사가 죽고 휴가 출발을 못한 병사는 간 밤에 다려놓은 군복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는 곳.
나는 잠시지만 혹시 내가 철수가 아니었나 하고 궁금해한다. 냉담한 분위기의 두 사람의 짧은 연애, 언젠가 그 안에 내가 있었다. 철수는 누구였던가.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철수란 모든 남자였는지도 모른다. 책의 중간쯤 여주인공의 독백에 이르자 나는 극도의 착란에 빠진다.
닭은 싫다.
무언가 겹쳤다. 5사단에 있을 때 W가 면회를 왔다. 닭은 싫다. 외박을 나와 W가 저녁으로 닭을 먹자고 했을 때 내가 한 대답이 그랬다. 만약 그때 내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저녁으로 튀긴 닭을 안주 삼아 그녀와 맥주를 마셨더라면 내 삶은 지금과는 다를지도 모른다. W는 그 이유 때문은 아니었겠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의 호출기에 헤어지자는 말을 녹음해 놓았다. 다음 날 W는 자신의 호출기 비밀 번호를 바꾸었고 나는 더 이상 그녀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다.
당시엔 납득할 수 없었던 갑작스러운 이별의 이유를 시간이 지난 지금은 어렵지 않게 짐작해 낼 수 있다. 구속과 자유는 언제나 충돌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란 걸 늦게야 알았다. 각자의 다른 세상에 몸담은 두 사람은 엇갈리기 마련이란 걸. 흔히 그것을 규정짓는 배신이란 어휘는 사실 본질에 있어 상당한 거리가 있다. 헤어짐이란 당연한 흐름을 사람들은 애써 순리를 거스르는 일이라 규정하여 붙잡으려고 한다. 하지만 서로 다른 이치를 지닌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어김없이 잡았던 손을 놓고 만다.
물론 나는 철수가 아니다. 나는 89년이 아닌 95년도에 5사단에서 근무했고, 철수처럼 실습 분대장도 아니었다.
시선은 책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잠시의 그 틈을 노려 돈까스가 내 앞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칼국수 전문 식당에서 돈까스를 시킨 건 이전에 이미 이 식당의 칼국수가 입맛에 맞지 않음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건 나을지도 몰라. 하지만 돈까스도 제조일이 오래된 쿠키처럼 딱딱했다. 그 뒤로 나는 그 식당에는 가질 않았다.
입시 학원에서 영어 강사로 일한 지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내신에 혈안이 된 아이들의 교과서 보충수업이 내 일이었다. 나는 식당문을 열고 건너편 학원을 향해 걸어가며 생각했다. 소설가가 꿈이었던 학원강사일 수만은 없다,라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가족 중에는 나 혼자 뿐이었다. 아는 분의 소개로 학원으로 나를 집어넣은 아버지는 그날 아침에도 변함없이 내게 학원에서 착실하게 돈을 벌 것과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전공해서 교사가 될 것을 주장하셨다. 교사의 장점에 대한 꽤나 긴 연설을 나는 들어야 했고, 며칠 뒤의 입대를 앞둔 동생은 소파에 누운 채로 출근하는 내게 이제부터 형이 가장이니까 정신 차려,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들이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거미줄은 떼어내려 할수록 몸을 휘감았다. 보이지 않아도 언제나 내 몸을 휘감고 있는 그 끈끈함.
아침부터 나는 아무 데고 버스를 타고 가다 내려서 첫눈에 들어온 휴대전화 대리점에서 여분의 핸드폰 배터리를 사고, 과 후배인 현수와 제법 긴 전화통화를 하고, 세 권의 소설집과 영화 “Blue” 의 OST를 샀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기면 나는 그런 식으로 애써 모아 둔 돈을 써 버렸다. 지갑은 다시 얇아졌다.
배수아 같은, ‘철수’ 같은 소설을 쓰고 싶다,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횡단보도 뒤편에는 빽빽한 수업 시간표가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동생은 예정보다 하루 먼저 입대를 위해 서울을 떠났다.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동생을 전송하다 나는 눈물을 흘릴 뻔했다. 의외였다. 버스가 떠난 뒤 험상궂게 생긴 아저씨에게 핀잔을 들어가며 건네받은 담배를 피우며 나는 당분간은 복잡하게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고 가르치는 일만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