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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물원킨트 May 30. 2024

에피소드 8½; 1999 (3)


#3½


‘바그다드’라는 카페에는 사막도 없었고 매직쇼를 하는 여종업원도 없었다. 흘러나오는 노래 역시 ‘Calling You’가 아니라 컴필레이션 앨범의 일회용 팝송이었지만 과히 나쁘지는 않았다.


만나기로 한 여선생은 아직 나오지 않았고, 대신에 나는 우연히 그곳에서 한 여자를 만났다. 세 번째로 사랑했던 여자, 2년 전쯤 헤어진 여자였다. 손톱 끝이 갈라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해서 핸드백에 늘 손톱깎기를 두고 있는 여자와의 돌연한 해후였다. 주말 연속극의 한 장면 같군.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지만, 실제로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오랜만이군요.”


소영, 그녀의 이름이었다. 소영은 그렇게 말하고는 서슴없이 내 앞에 앉았다.


“실은 약속이 있어. 좀 상황이 복잡한데.”


“걱정 말아요. 그 일 때문에 왔어요.”


“그 일?”


“학원으로 건 전화, 실은 내가 했어요.”


설마.


“다른 목소리였는데…?”


“물론 전화를 한 건 영어 선생님이 맞지만, 시킨 건 나였으니까.”


그녀는 웃음을 띤 채 말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설명이 필요하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지금 학교에 양호 선생님으로 있어요. 그래요, 놀랄 줄 알았어요. 당신에겐 대단한 변신이겠죠, 아마. 어쨌든요, 가끔 아이들은 실제로 아프지도 않으면서 숙제를 하기 위해서 양호실에 내려와 있죠. 대개 그런 애들은 십중팔구는 다른 아이들이 한 숙제를 베끼고요. 근데 낯익은 글씨가 눈에 띄더군요. 단번에 당신인 줄 알았죠. 당신 같은 필체는 흔치 않으니까.”


“그랬군.”


주말 연속극을 닮은 삶은 어이없게도 절묘한 우연으로 점철된다.


“참, 그리고 걱정 말아요. 당신이 한 숙제는 하나도 틀리진 않았으니까. 그런데…”


“그런데 왜 내가 학원 선생이 되었는가 하는 거로군?”


“맞아요.”


“설명이 필요하죠?”


나는 그녀의 말을 흉내 냈다. 그녀가 가볍게 웃었다. 나는 대강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잠깐만. 당신은 전공이 국문학이잖아요? 왜 영어 선생이죠?”


여태껏 아버지는 당신의 자식이 부모의 뜻을 어기고 국문학을 택했다는 사실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아버지는 당신의 동창들 앞에서 자식을 영문학도라고 말했고, 학원의 자리를 부탁하면서도 영문학 전공이라 말씀하셨던 모양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 필요도 없었고 그다지 중요한 문제도 아니라는 생각에 내버려 두었다. 하지만 나는 아울러 거짓말을 방조하는 역할까지 떠맡아야 했다. 아무튼 아버지는 자식의 전공이 영문학이라 굳게 믿는 눈치셨다.


“어때요? 학원 선생님은 할 만한가요?”


“언제나 막차를 타지. 도심을 빠져나오는 마지막 버스에서 내려 마지막 4호선을 타고 다시 또 마지막 버스로 갈아타는 그런 삶. 자정을 향해 달리는 버스 안에서 넥타이를 풀면서 잠들 수 있는 시간만을 떠올리지.”


창문 너머에만 있을 것 같은 시간.


그날 소영과 나는 저녁까지 함께 먹었고, 그 언젠가처럼 나는 그녀를 집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밤길을 걷다가 그녀가 문득 생각이 난 듯이 말했다.


“당신 여전히 피죤을 쓰고 있군요.”


“피죤?”


나는 소매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하지만 잘 모르겠다.


“실은 나 다시 당신을 만나고 싶어요. 예전 같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가끔은.”


그녀는 정면을 주시한 채 날씨를 이야기하듯이 말했다.


“그것도 나쁘지 않군.”


“대신에 조건이 있어요.”


“조건?”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요.”


나는 무슨 뜻인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신에게 학원 선생님은 안 어울려요. 예전처럼 나한테 엉망으로 굴어도 글을 쓸 때의 당신이 훨씬 좋은 것 같아요.”


나는 한 달 후에 학원을 그만두었다.



#4


그 뒤로 몇 번인가 나는 소영과 만났다. 저녁 식사를 함께 하거나 새로 개봉한 영화를 찾아다니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연애였다. 주말의 답답한 야구 중계가 번화가의 바람으로 바뀌었지만, 소영과의 만남은 예전에도 한 번 달린 적이 있는 정해진 장애물 코스를 달리는 이인삼각 경주 같아서 나는 장애물조차 시시해 보였다. 아니 시시했다기보다는 어쩐지 경계를 그어놓은 울타리에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소영을 안고 싶었다. 전처럼 모텔에서 함께 서로를 나누기를 원했지만 그녀는 그것만은 안된다고 단호하게 거부했다. 두 해전 그녀와의 밤이 나에게는 마지막 정사였다.

4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소영은 조금 정색을 하고서는 말했다.


“나도 학교를 그만뒀어요. 그리고 다음 주에 뉴저지로 떠나요.”


“어디?”


어디라고?


“뉴저지.”


내가 사랑한 여자들은 뉴저지로 떠난다. 뇌의 어딘가에 설치된 프롬프터에서 그런 문장이 출력되었다. 그녀들은. 아아, 이런 식이로군. 첫사랑이었던 여자는 삼 년 전 두 살 많은 남자와 결혼해서 뉴저지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엔 소영이 그곳으로 떠날 차례라고 말하고 있다.


“거기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보고 싶어요.”


내가 사랑한 여자들은 뉴저지로 떠나 그곳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프롬프터에서는 좀 더 긴 문장이 출력되었다. 뉴저지에는 그녀들의 새로운 인생이 있다. 나를 만나고 사랑하고 떠나서 뉴저지에서의 새로운 출발. 그런 순서이다. 한 사람이 떠난 뒤 3년 만에 되풀이되는 사건. 첫사랑처럼 소영도 뉴저지로 간다.


인생의 사소한 반복은 어디까지일까.


나도 그곳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보고 싶다. 하지만 나는 떠날 수 있는 자본도, 의지도, 적응력도, 결단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왜 그녀들은 당위성을 지닌 이유도 없이 떠나는가. 왜 나만 이곳에 남는가. 떠날 수 있는 사람은 여자뿐인가. 잠시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소영이 뉴저지로 떠나기 전날에도 나는 그녀를 만났다.


“당분간 마지막이겠군요.”


“아마 영영 마지막일 거야.”


“미안해요, 당신과 잘 수 없었던 거. 가끔은 그러고도 싶었지만 왠지 그래선 안된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오래전에 당신과 한 침대에서 했던 일은 참 좋았던 것 같아. 그것만은 기억하고 있을 거예요. 대신에…”


그녀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가방을 열어 봉투를 꺼내 내 앞에 내밀었다.


“이 돈으로 여자를 사요. 나와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소영과의 마지막이었다.


함부로 구겨져 새벽의 아스팔트에 버려진 하얀 봉투는 시든 목련꽃 같았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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