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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물원킨트 May 30. 2024

에피소드 8½; 1999 (2)


#3


“송림학원 김정현 영어 연구실입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나는 그렇게 자동응답기 같은 말로 전화를 받았다. 통신보안 본부중대 병장 누구입니다,라는 말하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다만 나는 어시스턴트인 내 이름 대신에 대표자 격인 김 선생의 이름을 댄다는 차이만 있었다. 군대와 학원은 위계가 분명한 조직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3월 16일이었다.

개학을 했기 때문에 저녁 수업 시간까지는 시간이 있어서 나는 출석부를 점검하고 있었다.


“거기 새로 오신 영어 선생님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전화를 건 사람은 여자였다. 학생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전데요.”


“요점만 간단히 하죠. 저는 계현여고 영어교사인데 애들한테 내 준 프린트 때문에 그런데…”


고입 예정인 여학생들이 얼마 전 봄방학 과제인 프린트물을 가지고 나를 찾아왔다. 과제물은 영어속담 50 문장이었는데 아이들은 단 한 문장도 어떻게 해 볼 궁리도 하지 않은 채로 급하다며 떼를 썼다. 나는 사전을 이 잡듯이 뒤져 각각의 문장에 해석을 적어주었다.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해야 했다. 전화는 불현듯 그 이상한 문서의 ‘You can't eat your cake and have it.’ 이란 문장을 떠올리게 했다. 먹은 케이크는 남지 않는 법. 둘 다를 가질 수는 없다. 바로 그 프린트였다.


“저는 애들이 직접 하라고 나눠준 겁니다. 게다가 몇 개는 틀리기까지 하셨더군요.”


학생들 중에 몹시 게으른 몇몇은 아예 스스로 답도 쓰기 싫어서 내가 해준 프린트물을 복사해서 낸 모양이었다. 낭패였다. 그렇다고 하고 싶지 않았던 일이었다고 변론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학원이란 강사의 자유의지가 용납되지 않는 시스템이란 걸 설령 상대방에게 납득시켜 봤자 남는 것은 자신의 초라함 뿐일 게 뻔했다.

전화를 건 여자는 일부러 최대한의 건조하고 냉정한 어조로 말하려는 태도가 역력했다. 때문에 나는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차라리 여자가 화를 낸다면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여자가 말했다.


“일요일 세 시에 계현여고 앞에 있는 ‘바그다드’라는 카페로 나오세요.”


여자는 다짜고짜 만나야겠다고 말했다. 나는 당장의 죄스러운 마음에 그러겠다고 대답했지만 전화를 끊고 보니 어이가 없었다. 기분이야 나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불러내 직접 확인사살까지 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 하지만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이 있다. 하긴 학생의 과제를 대신해주는 나 같은 사람도 있으니까. 그러나 불편한 자리가 될 것임엔 틀림없었다.


나는 몇 번이고 주저했을 뿐, 김 선생에게는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퇴근길에는 괜히 이러다 일이 커지는 것은 아닐까 하고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날 밤에 한 편으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오히려 말을 하지 않은 편이 훨씬 낫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적당히 내 선에서 잡음을 일으키지 않고 일을 끝낼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었다.


그런데 바그다드 카페라니, 펄시 애들론의 그 영화 말인가.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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