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한다면 그건 유령이 되는 거야

아사이 료, 『정욕』 독후감

by 세포뭉치

누군가가 “아, 그거 알지, 다 이해해”라고 하면 그 즉시 상대가 미워진다. “무얼요?”라며 상대의 얼굴이 당황으로 일그러질 때까지 비웃고 놀려주고 싶을 때도 있다. 나는 설익은 친절함 보다는, 내가 “무얼요?”라며 되물을 때 상대의 얼굴에 떠오르는 창백한 느낌표를 좋아한다. 그 때 무너지는 사회성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붕괴하는 것을 바라보는 아찔한 쾌감.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하는 따뜻한 말이 여기에 겹쳐 보인다면 나는 너무 뒤틀린 사람일까. 어쩌면 성격적 결함으로서의 심술, 상대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아집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중2병이라는 말을 쓰길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나는 이미 중2의 2배 보다도 나이를 많이 먹어버렸는데. 내가 아침에 가서 저녁에 나오던 곳이 회사가 아니라 학교였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렇지만 분명 다른 점이 있다. 회사에서는 이죽대는 얼굴을 표정으로 떠오르게 하지 않고 무의식 밑으로 가라앉히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그 방법을 익혀 거룩한 생활의 비료로 쓴다. 고약한 냄새도 익숙해지면 구수함으로 포장할 수 있다.


도대체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이해’가 어떤 사람의 언어체계에서 어떤 의미로 쓰이는지에 따라 다르다는 것은 분명하다. 좁은 의미에서 1+1=2라는 수학적이고 논리적인 이해일 수도, 당신의 마음에 와 닿았다는 넓은 의미의 이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타인의 마음에 대해서는, 이해한다는 말은 결국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식이라고 생각한다. 이해는 기본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의 역사 속에서의 이해이기 때문이다. “다양성, 이 단어 속에는 축복과 비슷한 이미지가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결국… 말하는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 안의 ‘자신과 다른 것’에만 해당하는 말입니다.”(8) 이런 점에서 이해는 궁극적으로 자신 밖에 있는 것을 빨아들여 자기의 것으로 바꾸는 작업이다. ‘말하는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 안으로 타자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해받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여기에서 배제된다. “이해하다니 뭘? 너희가 이해하든 안 하든 나는 변함없이 여기 있어.”(304) 다이야의 외침은 유령이 되지 않으려는 인간의 외침이다.


안타깝게도 이해는 타자를 왜곡한다. 그러나 그것이 선의를 가지고 타자에게로 나아가는 길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나와 생각이 다른 너와 더 얘기하고 싶어. 전혀 다른 머릿속의 자유를 서로 지키기 위해 더 이어지고 싶다고, 더 함께 생각하고 싶다고, 나는 지금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404) 여기 야에코의 말이, 독자들에게 단순히 ‘올바른 생명의 순환’에 속해있는 사람으로서의 실존적 불안을 떨쳐내기 위한 정답 제출 행위로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 속에 모종의 진심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비록 ‘진정한 이해’(가령, 통通했다고 할 때처럼)의 방식은 아닐지 모른다. 그렇지만 야에코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나선형 발전이라든지, 양질전환이라든지 하는 개념을 어떻게든 믿어보고 싶어진다.


나쓰키와 요시미치의 연대는 보다 직접적이고 즉각적이다. “자기 몸이 누군가의 몸과 닿아 있는 동안에는 이 몸에 배어있는 슬픔과 외로움의 역사가 땀구멍을 통해 흘러나가는 듯 했다”(385) 그들의 방에서는 두 사람의 체온이, ‘살의 연대’가 경계들을 녹여내고 있다.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검사 히로키로 상징되는 당연함의 체계, 그 거대한 기계의 구석에 조그마한 녹이 슬고 있다. 그들의 작지만 큰 승리를 기원한다. 정말 간절하게, 두 사람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들이 서로에게 남긴 전언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들이 무한히 가깝게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으면 좋겠다. 이해하지 않으면서, 암흑과 침묵 속을 더듬어가며.


*글 제목은 김사월X김해원의 <비밀> 가사 중 일부다. 이하 가사 일부: 이해한다면 그건 유령이 되는 거야 /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없겠지 / 나를 아껴줘, 아니 그냥 내버려 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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