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릭끼릭

한병철,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 독후감

by 세포뭉치

사부작거리며 뭔가를 만드는 게 어릴 적 나의 취미였다. 재료는 주변의 모든 잡동사니. 학교에서 쓰다 남은 미술 준비물, 집안의 각종 쓰레기들을 보면 그걸로 뭔가 만들어낼 생각 에 가슴이 뛰었다. 장식장에서 빼낸 서랍에 고무줄을 감아 현악기를 만들기도 했고, 나무젓가락으로 고무줄 총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단연 기억에 남는 것은 내가 만든 여러 보드게임들이었다. 주사위를 굴려 출발지에서 도착지까지 가는데, 올라갈 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고 떨어질 땐 뱀을 타고 떨어지는 클래식한 모델이 시작이었다. 주사위를 두 개 굴린다든지 한 명이 두 개 이상의 말을 운용하는 장대한 스케일의 게임도 있었고, 두꺼운 도화지를 이용해 미션카드를 제작해 넣었던 게임도 있었다. 파는 것들에 비하면 조악한 수준이었겠지만, 다양한 기성 보드게임을 즐길 수 없었던 당시 아이들에게 나의 작품은 꽤 인기가 있었다. 우연히 우리 집에 들렀던 사촌형이 내가 만든 게임들을 보고 “네가 이걸 다 만들었다고?”하며 놀라던 표정은 크다 못해 늙어가는 지금에도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어른들이 빠져나가 고요함만 남은 집, 창문을 열면 옥외계단을 오르는 옆집 사람과 눈이 마주치는 작은 방에서 시작되던 몰입의 시간. 책상도 없이 쭈그리고 앉아 잡동사니를 조물거리며 두세 시간을 그냥 보내던 그 때. 마음 속 서랍 깊숙이 간직한 시간들 중에서도 특히 자주, 닳을 정도로 꺼내보던 그 시간들이 그립다.


안타깝게도 그 다음에 올 부사는 ‘그러나’이다. 언제인지 모르게 몰입의 시간은 공허의 시간으로 대체되었다. 확정적인 문체에 따라붙기 마련인 모종의 망설임도 여기에는 없다. 평범한 요즘 사람들에게 있어, 몰입이 공허로 대체되었다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명제이지 않나 싶을 정도다. 어린 내가 작은 방에서 나만의 예술을 펼치던 어느 날, 엄마는 내게 이렇게 말했었다. “그런 걸 뭐하려고 만들어? 쓸 데 없이.” 화내고 울고불고 소리 지르며 거부하던 그 말이 이젠 그리 거북하게 들리지 않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사회를 진단하는 철학자 한병철이라면, 이 질문에 이렇게 답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내면화된 최적화 논리 때문이라고. 그에 따르면, 인간은 ‘권력의 성장이 죽음에 반하는 생존능력을 증가시킨다’는 심층적인 심리를 갖고 있다고 한다. 예컨대 원시사회에서 주로 발견되는, 적의 신체 일부분을 전리품으로 취하는 현상은 전리품 소지자의 ‘축적된 살해능력’(22)이 생존능력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축적된 살해능력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은 축적된 자본과 데이터다. 사람들은 죽음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필사적으로 성과물을 축적하려고 한다. 자본주의와 데이터 중심 사회가 숭상하는 수치들은 사람들을 놀랍도록 효율적으로 계급화한다. 이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죽도록 최적화한다.”(25) 주변을 둘러보자. 우리 중 다수는 컴퓨터게임을 할 때마저 최적화를 마친 정형적인 플레이 방법을 선호하며, 그 정석에서 벗어난 캐릭터에는 ‘망캐’(망한 캐릭터)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게임의 플레이 스타일이 일상의 습관을 반영한다는 것에 동의할 수 있다면, ‘망캐’라는 말의 섬뜩한 함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단축키 한번에 일사분란하게 자동으로 정렬되는 엑셀 프로그램의 셀들 같다.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성을 가장 잘 이용한 체계라고 말한다. 나도 일정부분 동의한다. 그러나 마땅히 개체의 생존에 도움이 되어야 할 본성이 오히려 개체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다면 어떨까? 한병철의 말처럼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성장이 실은 ‘암 덩어리들의 목표 없는 번성’(15)이라면?


“진정성은 신자유주의적 생산 전략이다. 나는 나 자신의 경영자로서 끊임없이 나 자신을 생산해야 한다는 강제에 예속된다. 자기를 생산해내지 못하는 사람은 면도날을 움켜쥔다.”(76)


한병철은 최적화논리가 내면화된 개인들이 파괴적인 자기착취 습관에 잠식되어있음을 지적한다. 자기 경영자들의 시선은 오직 자기 자신을 향해 있으며, 그들의 눈은 타자에게서 반사되는 빛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타자의 새로움(부정성)과 관계하지 않는 자아는 모든 것에서 자기 자신밖에 지각하지 못한다. 한병철의 말을 빌리자면, “나르시시스적 주체는 자신의 그림자가 드리운 세계를 지각한다.”(76-77) 사람들을 만날 때 그들의 표정과 취향보다 그들의 자산과 연봉이 먼저 궁금해진 적이 있다면 ‘나르시시스적 주체’의 상태가 어떤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성과 피라미드에서 자신의 위치를 지각하는 데에 온 정신을 빼앗긴다면, 이제 타자는 어떤 매혹도 주지 못한다. 그리고 어떤 매혹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공허해진다. 이제 타자의 매혹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쾌적한 느낌과 귀결 없는 흥분”(31)이다. 새로운 것에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고통 없이 무제한적인 흥분을 제공하는 매체, 유튜브가 전 세계를 지배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자기 전 침대에 누워 대신 먹고, 대신 여행가고, 대신 연애하는 것을 본다. 연극이 끝나고 불이 꺼지면 더 없이 공허하다.


안타깝게도 이런 류의 시스템 비판서에서 늘 해법은 주어지지 않는다. “연결망을 이룬 저항 및 혁명 군중”(7)의 등장이라는 섹시한 가능성은 이 책의 표제작인 「오늘날 왜 혁명은 불가능한가」가 일찌감치 제거해 버렸다. “선생님은 세상 험담하느라 많은 시간을 낭비합니다.”(203)라는 대담 진행자의 말에 조심스레 고개가 끄덕거려질 정도다. 분명 개인이 시스템의 훌륭한 볼트와 너트로 기능하는 이 사회에서 일시적인 변혁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개인의 자리에서 꿈틀거리는 것마저 의미 없는 것으로 치부된다면 세상이 너무 암울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작은 볼트는 오늘도 두 손을 가슴 앞에 맞잡고 조용히 몸을 비틀어 본다. ‘끼릭끼릭—’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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