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소년이 온다』 독후감
신학기의 어수선함과 기대감, 그것들이 한데 섞인 야릇한 설렘을 갖고 캠퍼스의 경사로를 오를 때였다. 학과의 일로 조금 알고 지내던 후배가 내게 인사를 건넸다. 피차 궁금할 것도 없는 상투적인 인사말 끝에 그 친구가 내게 말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곤란한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다는 듯 약간의 미소를 띤 표정에 미세한 경련으로 파문이 일었다. 새하얀 얼굴이 낙엽같이 쓸쓸했다. 그 공간을 울리는 떨림이, 소리 없는 비명이 나의 일상적인 세계를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잔해 사이로 침투한 그 말이 내 마음 깊숙한 속살에 부서져 흩뿌려졌다. 비슷한 장소에서 몇 달 전에는 아버지의 부고를 전했던, 고작 스물 두엇의 그 애. 그 앞에서 나는 어떤 말도 건넬 수가 없었다. 바닥이 없는 구덩이에 빠진 기분이었다. 몇 초간의 정적 후, 구덩이에서 간신히 왼팔을 건져 내어 그 애의 어깨를 몇 번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그게 나의 최선이었다.
어떤 사건은 그것을 설명하는 말과 대응되지 않는다. 그것을 말하기에 설명은 너무나 희망적이기 때문이다. 유려하게 치장한 말들은 우리를 미래로 데려가며, 그 먼 곳에서 사건은 깔끔하게 표백처리 된다. 따라서 설명은 늘 사건을 나타내는 데에 실패한다. 우리가 사건을 접하게 되는 것은 언제나 실패한 말들에서다. 비틀비틀 나아가는 걸음, 우두커니 바라보는 눈길, 좀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 실패가 예정되어 있는 절름발이, 귀머거리, 벙어리 말들. 이렇게 부서진 채로 도착한 말들만이 우리 몸으로 스며든다. 『소년이 온다』에서도 그렇다.
“아니, 여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이고 있을 뿐이다. 그 입술의 모양을 그녀는 또렷하게 읽을 수 있다.…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99)
이 작품에서는 민주주의라든지, 민주화라든지, 자유라든지 하는 말들이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멀끔한 형체를 잃어버린 것들— 상처들, 시체들, 영혼들이 그들의 모습을 가만히 보여줄 뿐이다. “태극기로, 고작 그걸로 감싸보려던 거야. 우린 도륙된 고깃덩어리들이 아니어야 하니까, 필사적으로 묵념을 하고 애국가를 부른 거야”(173) 선주의 말처럼, 사람들은 도무지 해명될 수 없는 것 앞에서 쓰러지지 않기 위해 숭고함에 기댄다. 이럴 때의 숭고는 그 자체로 추구되는 가치라기보다는 망자를 전송할 때 들려 보내는 지전紙錢에 가깝다. 그것은 과거를 수정할 수도, 미래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도 없다. 다만 급작스러운 의미의 붕괴에 저항하기 위한 남은 자들의 기원일 따름이다. 그것이 아무것도 지탱할 수 없는, 더없이 허망한 모래기둥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죽음이 전적으로 무의미한 일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누군가의 죽음은 단순히 심정지라는 의학적인 상태로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타인과 엮인 채 살고 있으며, 따라서 사람이라면 누구도 고립된 개체로 죽지 않는다. 어떤 이의 죽음 이후로, 우리는 그와 얽힌 우리의 일부가 천천히, 그리고 아주 고통스럽게 떨어져 나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하는 입장에 처한다. 하물며 급작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죽음들은 어떻겠는가. 그것은 공동체의 얽히고설킨 살이 무도한 완력에 의해 뜯겨 나가는 일이다. 좀처럼 딱지가 앉지 않는, 우리 안의 가장 깊은 속살을 베어내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우리는 결코 신음하는 사람의 선연한 고통에 고개를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 사이에서 휘몰아치는 메아리에 저항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