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원은 사흘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수술이 끝나고 마취가 서서히 풀리기 시작하면서 진짜 싸움이 시작되었다.
무통 주사의 효력이 사라지면서 통증은 밀물처럼 몰려왔다. 앉는 것도, 눕는 것도, 걷는 것도, 모든 자세가 고문이었다. 계속되는 통증만큼 무통 주사의 양도 늘어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취 후유증까지 찾아왔다. 수술 전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거의 없긴 하지만 1% 확률로 후유증이 생길 수도 있어요.”
하필 그 1%에 내가 들어 있었다. 일어나 앉기만 하면 머리가 핑 돌고, 세상이 흔들렸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란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무색하게도, 그 현기증은 꼬박 일주일 동안 나를 따라다녔다.
하필이면 수술 당일이 남편의 생일이었다.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미안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 미안함조차 통증에 묻혀버렸다. 남편은 퇴근하자마자 한 시간 넘는 거리를 달려 병실로 왔다. 웃으며 생일 축하 인사를 건넬 여유도, 케이크 하나 마련해 둘 기력도 없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내 얼굴을 보며 남편은 애써 웃었다.
“고생했어.”라고 말하며 조용히 내 손을 잡았다. 언제나 따뜻한 남편의 손길에 미안함과 고마움이 동시에 피어올랐다.
무엇보다 동생이 없었다면 나는 그 시간을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아침이면 화장실에서 벌벌 떨고 있는 나를 따라 들어와, 좌욕에 쓸 뜨거운 물을 먼저 준비해 주었다. 나는 통곡과 울먹임 사이를 오가며 고통에 휘둘렸다.
동생은 그런 나를 한 번도 외면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등을 쓸어내리며 “곧 괜찮아질 거야. 언니.”라고 말해주었다. 차가운 병실 속에서 그 한마디, 그 손길이 내게는 생명의 동아줄 같았다.
무통 주사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견뎠고, 밤에는 잠조차 설쳤으며, 아침이면 다시 화장실이라는 전쟁터로 향했다. 예상했던 3일의 입원은 일주일을 채우고 나서야 끝이 났다.
퇴원 후에도 동생의 돌봄은 끝나지 않았다. 한 달 동안 우리 집에 머물며 나와 아이의 모든 보살핌을 도맡았다. 매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화장실과의 전쟁이 시작됐고, 동생은 내가 일어나기도 전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울면서도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그런 동생 덕분이었다.
나는 제 몸 하나 가누기 힘든 상황에서 아이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그 틈을 동생이 채워줬다. 아픈 언니를 대신해 조카에게 이유식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심지어 언니의 밥까지 차려주며 묵묵히 언니와 조카를 돌봤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마움이 쌓여, 가슴이 먹먹해졌다.
사람들은 “치질 수술은 별거 아니야. 하루이틀 불편한 정도지.”라고 한다.
도대체 누가 그런 말을 퍼뜨린 걸까? 겪어보지 않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아무리 흔한 수술이라 해도, 당사자가 아니면 함부로 말해선 안 된다. 치질 수술은 분명 수술이다.
그리고 수술 이후의 고통은 생각보다 훨씬 깊고 오래간다.
두 번의 수술이 한 번으로 끝난 걸 다행이라 여겼다. 한 번의 수술이, 그 한 번의 고통이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게 될 줄 그때의 나는 몰랐다. 그리고 그 기억이 아픔만이 아니라, 사랑과 감사로 가득 찬 이야기로 남게 될 줄도 몰랐다.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평범한 일상의 고마움을 이 글을 쓰면서 절실히 느낀다.
평범한 순간들이 얼마나 값지고 귀한 것인지를 나는 이제 안다.
이런 언니의 평범한 일상을 되찾아준 동생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