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기적이게도.
나는 여자로 살아오면서 저런 추행 안 당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것도 행운이라 생각하며 먼 산 보듯 그녀들이 쥐어짠 고통의 고백을 보았고,
남 일인듯 힘내라고, 응원한다고 댓글을 달았다.
그런데 말이다...
최근에 아이들을 재우고 하루를 마감하고 잠도 잘 들었는데 새벽에 자꾸 깨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둠의 스크린에 과거의 한 바닥을 생생하게 재생했다. 내 의도와는 다르게 불쑥.
뜨거운 햇살아래
끈적임을 견디며 나는 집으로 가고 있었다.
하교길은 적막했고 갑자기 세상은 원래 그랬다는듯 조용했었고 오로지 건너편에 군복을 입은 남자 둘이 걸어오고 있었을 뿐이었다. 땀이 식고 서늘한 소름이 돋았다. 그들이 조용히 지나가길 바라며 시멘트 담벼락에 살갖을 맞대며 걸었다. 그들은 웃으며 내 팔을 힘주어 잡았고 한참을 그대로 있다 놓아주었다. 빨갛게 남은 그들의 손자국을 지우고 지웠다. 씻고 씻었다. 커다란 해바라기가 있는 원피스에 노란 플라스틱 구슬 목걸이를 하고 등교했던 국민학교 4학년 때의 일이었다. 나는 다시는 그 옷을 입지 않았다. 극도의 긴장감이 다시 엄습할까봐.
부모님 소개로 만난 의사는 처음 본 자리에서 밥을 먹다가 옆자리로 와, 갑자기 키스를 했다. 입 냄새와 음식물이 더럽게 넘어왔다.
부장님 소개로 만난 사업가는 커피를 마시러 가는 길에 엉덩이를 만졌다.
친한 동료의 친척은..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말로 매일 밤 전화를 하고 문자를 보냈다. 그의 전화를 받지 않자 집 앞에서 기다리기 일수였다.
멋진 사람이라 사귀기로 한 남자는 그날 모텔로 끌고 가려해 사투를 벌였다.
선을 보고 굳이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던 한 남자는 불빛이 없는 화성의 어디로 차를 몰아가 바지를 내렸다.
우리 반 학생이 졸업 후에 전화 해 나에게 스타킹을 달라고 했다.
나는 번번이 커다란 해바라기 원피스를 입은 국민학생 때와 같이 아무 말 하지 못했다.
뭐라고 소리가 나지 않아,
내가 내는 목소리가 더 큰 위협으로 나에게 돌아올까봐 겁이라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의 행실이 잘못 됐는지 복기하는 것과...
자책하는 것.
그리고 스스로를 존중하지 못해
단호히 목소리를 못낸 것이라 나를 원망하는 것.
쓰레기 같은 사람을 욕하는 것.
그리고 괜찮다...
나는..괜찮다...라고 위로하며 기억을 지우려 애썼던 것.
그들의 미투가, 나의 상처도 후비고 핥고 있었다.
아빠와 남편과 늦은 밤 와인을 한 잔했던 날.
아빠는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20년 전 성추행 같은 걸 지금 와서 말하는 것 좀 심하지 않냐고. 증거도 없고 그때 분위기도 지금과는 다르지 않았냐고.
나는 분노에 찬 말을 쏟아냈다.
아직도 그런 상처를 지니고 20여년을 보냈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사는 상대의 잘못된 행동에 지금이라도 상처 받았다고 말할 수는 있는 거잖아.
아빠 딸도 괜찮지 않았다고.
내가 잘 못 한 것 같아 매일 매일 힘들었다고.
나는 이렇게 힘들었다고 말 할 수 있는 거잖아.
왜 가만히 있다가 이제와서 말하냐고?
이제는 말할 용기가 생겨서.
내가 잘못 행동한 게 아니라 그들이 잘못했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겨서.
아빠, 왜 내가 억울한 일 당했을 때
나만 가만히 있으면 된다고 가르쳤어?
왜 부당한 일을 말하면 괜히 일 크게 만들지 말라고,
내가 나쁜 애인 것처럼 대했어?
나는...
내게 닥치는 부당한 일에 대해 말하는 법을 배우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어.
너무 많은 용기가 필요해
아직도, 아직도
말하는 게..힘든 어른이 되어 버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