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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다리딩 May 18. 2018

감기에 걸린 날

침대에 가로 누워 있다. 템퍼가 주는 안락함, 포근한 순면 이불이 쾌적하게 오한이 드는 몸뚱이를 감싸준다.  목 사이 간질거림을 참아보려다 외려 된통 거센 기침이 쏟아져 나왔다. 근처 통을 집어 가래를 뱉었다. 걸죽하게 빛나는 비취색 가래가 뭐라도 되는 양 모였다. 며칠째 지독한 감기에 걸려 시간을 흘려 보내고 있다. 이렇게 하루 이틀, 시간을 보내다보면 낫겠지. 

  언젠가 거친 기침도, 끊임없이 샘솟는 가래도, 누런 콧물과 38.8도의 열도, 기분 나쁜 오한과 식은 땀도 수그러들겠지. 그럼 다시 삶에 대한 의욕이 생기겠지. 먹고 싶은 것이 생기고 어디론가 가고 싶은 마음이 들고 하겠지. 어린 아들들이 안방으로 들어와 엄마 빨리 일어나라고, 아침이라고, 밥 달라고 앵앵거렸지만 손가락하나 까닥하기 싫은 지금같은 무력증도 곧 사라지겠지.

 



 2주를 그렇게 앓으며 나는 민국이를 떠올렸다. 얼핏 민국이의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우리는 국민학생이었다. 민국이가 전학 온 날 아이들은 그닥 소란스럽지도 야단스럽지도 않았다. 같은 반이 아니었음에도 새로운 변화에 호기심을 가지는 스타일이 아니었음에도 나는  민국이를 알았다.  

 백일장을 앞두고 방과 후 문예반 선생님의 지도를 받기위해 민국이의 반에 갔을 때 민국이는 뭔가에 화난 사람처럼 빛바랜 남색 가방을 만화 주인공 까치처럼 짊어지고 휙 나갔다. 텅빈 교실에 걸상을 하나 끌어내어 앉았을 때 민국이가 남긴 냄새가 났다. 비릿한 돼지고기 냄새 같기도하고  고인 웅덩이의 비온 뒤 냄새 같기도 한 특이한 향. 나는 필통에서 엄마가 뾰족하게 깍아준 연필을 하나 내어 원고지 빨간색 네모 칸에 한 글자 한 글자 써내려갔다. 선생님은 마음 속 생각들을 적확한 단어를 사용해서 잘 표현해야 한다고 했었다. 엄마는 내가 경험한 것들 중 하나를 찾아내어 빛나게 의미를 부여하면 된다고 했었다. 6학년이 된 어느 날부터 글쓰기가 어려워졌고 재미없어졌지만 상은 받고 싶었었다.

민국이의 책생 서랍에는 새교과서와 공책이 그대로 넣어져 있었다. 빛바랜 필통에는 유행 지난 후레쉬맨이 포즈를 잡고 있었고 그 안에는 모나미 검은색 볼펜 하나와 아무도 깍아주지 않아 끝이 뭉툭한 몽당 연필 몇 자루, 위태롭게 갈라진 지우개 하나가 들어 있었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연필을 민국이의 필통에 넣었다. 사각사각 글씨 쓸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연필을.


 아이들은 민국이가 우리보다 한 살이 더 많다고 했다. 또래보다 키가 훨씬 크고 살집도 꽤 많아 그런 건지 사정이 있어 학교를 쉬었는지 모르지만 민국이는 아이들과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고집스런 곱슬머리와 찢어진 눈, 삐죽이는 입술로 누구에게도 관심없다는 듯 구석만 바라봤다. 일관된 표정이었다. 민국이가 전학온 지 얼마되지 않아 아이들은 민국이가 지난 밤 연탄가스를 마셔 죽을 뻔했다고, 그래서 며칠 째 결석이라고 했다. 민국이 혼자 자고 있다가 연탄가스를 마시고 죽을 뻔한 걸 일 마치고 온 민국이 아빠가 발견해 김치국물을 마시게 해 살았다고. 누군가 물었다. 그럼 민국이 엄마는? 민국이 엄마는 민국이가 어렸을 때 집 나갔대, 란 말이 나왔다. 지극히 아는 것이 적고 엄마 아빠가 있는 가정이 일반적이라 믿는 상식적인 국민학생들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민국이 불쌍해..여자 아이들은 눈꼬리를 내리며 안쓰럽단 표정을 지었다.

 민국이가 다시 학교에 나왔는지, 졸업을 같이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말 한 번 나눈 적 없는데 나는 식은 땀을 닦아내며 그를 떠올렸다. 민국이도 이제 마흔을 앞둔 아저씨가 되었겠구나.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았을까.


 감기는 나으리라. 언제고 독하게 괴롭히더라도 푹 쉬고 약을 먹고 영양 주사를 맞으면 조금씩 물러났으니. 그리고 내 마음의 외로운 곁도 상념도 잊혀지고 일상을 살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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