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를 낳고 무척이나 할머니가 보고 싶어 할머니 집으로 갔다. 좁은 골목길. 색이 칠해지지 않은 나무 대문, 울퉁부퉁 시멘트 담장, 낮은 문, 나무 툇마루.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마루에 나와 대문을 바라보며 오늘은 누가 오려나 하염없이 바라 보고 있던 할머니는 없다.
낡은 먼지 냄새만 할머니의 향을 품고 있을 뿐이다. 할머니의 향은 늘 흙냄새가 났었다. 쁘득쁘득하고 거친 손으로 내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던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나의 첫 아들의 보드란 뺨을 조심스럽게 만지셨다. 몇 번이나 아이가 울까봐 만지길 망설이시다가 괜찮다는 주위의 응원에 힘입어 용기내셨다. 갓 백일을 넘긴 아이는 방긋 웃었다. 그 후로 할머니는 '귀한 얼라~'라고 부르시며 우리가 오길 하염없이 기다리셨다.
부천님 오신 날, 모처럼 연휴가 주말과 연이어 길게 쉴 수 있으니 남편이 할머니 뵈러 상주 가자고 권했다. 그러나 나는 비슷한 시기에 결혼한 사촌들이 누가 더 시집을 잘 갔냐는 쓰잘 데 없는 자존심 경쟁이 피곤해 그냥 집에서 쉬자고 했었다. 집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나섰을 때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담담한 목소리로 아빠는 부음을 전했다.
핸드폰에는 아직 할머니의 번호가 남아 있다.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 하시고 핸드폰을 없앴을 때도 할머니의 번호를 지우기 싫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외웠던 할머니 집 전화 번호도. 지워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숫자들의 조합이 할머니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암호라도 되는 듯잊혀지지 않았다.
핸드폰에서 카카오톡 친구 목록을 주욱 훑는다. 새로 프로필 사진을 올린 친구들의 근황을 주욱 읽는다. 사진 하나로 그들의 마음을 읽어본다. 그러다 'ㅎ' 목록에 '할머니'의 프로필 사진을 클릭한다.
'새로운 시작, 감사합니다.'라는 상태 글 과 함께 환자복을 입고 기다란 링거 줄을 여러 개 단 대여섯 살 여자 아이의 사진이 뜬다. 한 동안 프로필 사진이 없었는데 할머니의 번호가 새 주인을 만나고 푸른 하늘 사진이 떴다.
나는 번호를 차마 지을 수 없었다.
나는 여전히 안면도 없는 그녀가 할머니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상태글이 바뀌면 마치 할머니가 새 소식을 전하는 듯 깜짝 놀란다.
아무 것도 넣지 않고 된장과 물만 넣고도 세상 최고 맛있는 된장찌개를 끓여주셨던 할머니. 절대적으로 나의 편이셨던 할머니.
안면도 없는 그녀는 세 아이의 엄마였다. 남편은 군인이었고,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 고춧가루며 각종 부산물을 카카오스토리에 올려 파는 것 같았다. 카톡 하나로 참 많은 걸 알수 있는 사진이 떴다. 그녀는 건강했다. 웃음도 삶도. 하지만 넉넉하지 않은 듯 늘 아이들을 위해 열심히 살아야겠다,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 엄마이고 싶다라고 상태글을 적었다. 그리고 가족 사진의 배경은 요즘 사람들이 보이기 위해 올리는 센스 있는 사진이 아니라 낡은 집에 다복한 가족, 알록달록한 한복들 정말 내 유년시절과 흡사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