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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다리딩 Jul 24. 2020

똥꼬 빠지게 일하고 남는 건 자괴감

밥벌이가 아니라 자아실현인 줄로 알고 일했습니다만..

일을 하면서 자아를 찾는 다는 것은 가능할까?

 24살에 일을 처음으로 시작했다.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나중에 일은 싫어도 실컷 하며 살게 될 터이니 시간 당 4천원 받으며 알바 하지 말고, 되도 않은 학원 강사나 과외일 하지 말고 제대로 공부해서 임용고시나 열심히 준비하고 공부할 수 있을 때 제대로 공부나 실컷 하라고 아빠는 늘 말했다.

 

 사회생활에 대한 갈증이 늘 있었던 나는 되도록 많은 경험을 해보고 단단해지길 바랐지만, 생각만큼 멋진 알바는 없었다. 죽도록 서 있으며 대형 문방구점에서 일해도 주급은 얼마 되지 않았다. 상처받는 일도 많았건만 나는 단단해지지 않았다. 그냥 뭔가 자꾸만 내가 생각했던 나의 모습에서 굉장히 이질적으로 초라하고 별 볼일 없는 사람이란 느낌이 강하게 들 뿐이었다.


- 바람에 높이 날아간 검은 봉다리.


첫 주급을 받고, 만 원짜리 몇 장을 지갑에 넣고 오며 든 생각이었다.


나는 어떤 일을 하며 살게 될까. 부디 그 일이 안정적이며  뭔가 스스로 당당함이 생길 명함 하나 주었으면 좋겠다. 이 세상에 단단하고 포근한 내 자리 하나 내 주었으면, 그리고 사람들이 그만큼 열심히 살아온 나의 존재를 인정해 주었으면. 월급을 눈치 받지 않고 제 때 받았으면, 정시에 점심 시간을 마음 놓고 먹을 수 있었으면.


첫 아르바이트를 끝내며 내가 바라던 직장은 더 구체성을 띄었다.

크고 작은 상처들이 나를 안정성에 대한 갈증이 강하도록 만들었다.



안정적이며 전문적인 일자리를 얻었을 땐, 나 스스로가 대견해 미칠 지경이었다. 내 돈을 내가 쓸 수 있다는 그 설레임과 뿌듯함.


그러나 즐거움도 잠시, 나는 월요일이 오기 전이면 출근하기 싫은 스트레스로 돈을 엄청나게 써대는 일요일을 보냈다. 출근하기 정말 싫었다. 익숙하지 않은 일은 늘 나를 괴롭혔다.


지금 돌이켜보면,

실수하기 싫고, 일 잘하고, 수업 잘하고 싶은 나와,

마음 만큼 잘 되지 않아 스트레스 받는 나.

그리고 타인의 시선을 엄청나게 의식하며 나를 무능하고 지루한 사람으로 보고 있지 않을까하고 두려워하는 나 .

그 사이 어디쯤 갈팡질팡하는 현실적 자아인 내가 있었다.


서툰 내 모습에

실망의 연속이었다.

인간관계는 생각만큼 쉽지 않았고,

어리고 거친 학생들은 쉽게 나를 따르지 않았다.

아니 욕했다.

나는 무능하고 예민한 감정 노동자였다.


그리고 선배들은 자꾸만 애정을 빙자한 자기 방식대로 나를 가르치려 들었다.

내가 학생들에게 얕보였기 때문에,

만만하게 보였기 때문에,

초임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잘 따르지 않는다며 자신만의 비법을 전수하기 일 쑤였다.

그들의 판단, 충고, 조언이 송곳같이 나를 쑤셔댔다.

내가..다..모질라서 그들이 자꾸 참견하는 것 같았다.


내 맘이 뾰족하니 무엇하나 편안하지 않았다.


자아가 그리 단단하지 못했던 나는

매번 퇴근 길에, 나는 왜 이다지도 모자르고 강하지 못할까 란 자괴감을 한덩이 안고 집으로 갔다.



그렇게 수 년을 보내고

나는 노력 때문인지. 경험치 때문인지

이제 그 누구도 쉽게 터치하거나 조언하지 않는

내 고유 영역을 만들 수 있었다.

함부로 나를 쉽게 규정 짓지 못하도록 일을 하고 싶었다.



반복되는 일을 십여년 하다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일을 적당히 해치우고 있구나!

(이것은 수업에 대한 일이 아니다. 수업외 엄청난 공문처리와 업무에 대한 이야기)


어느날 업무 메시지를 보내고 나니,

담임들에게 일이 너무 많으니 비담임이 이 일을 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핑퐁처럼 날아 왔다.

메뉴얼에 따라 이렇게 일을 해야 한다고 했더니 하소연이 넘친다.

아.... 어쩌란 말이냐.

모두가 이해가 된다.

서로가 넘쳐나는 일들을 감당해 내느라, 지쳐 있었다.

업무 쪽지의 몇 글에도 고단함과 예민함이 티나게 묻어난다.


하루종일 인사외 한마디도 못했던 옆자리 짝궁에게

학교 중요 업무를 해내느라 너무 바쁘지? 라고 물었더니

너무나 쓸쓸한 얼굴로,

"제 일이요? 하루종일 쓸 데 없는 자료조사하다 가는 거에요.

그런데도 너무 피곤하네요." 한다.


세상에! 능력자 입에서 내가 생각하고 있는 말이 나오다니.



장마 끝, 쏟아지는 폭우를 견디며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오늘도 정말 끊임없이 소모되다 퇴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감정도, 생각도, 시간도 모조리.


그렇게 소모되고 받는 월급은 대기업 초봉이나 될까.


수업이 좋아, 국어가 좋아 교사가 된 나는

초임때의 그 모습에서 조금 단단해지고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그런 것일까?


일을 해 내는 만큼, 실수가 적어진 만큼,

사람들은 다들 기피하는 자리를 내어준다.

일이 많고, 시간도 많이 투자하고, 사람들의 불만도 많이 들어줘야 하는 일.

이상하게 잘 못하는 사람들, 말 안 통하는 사람들에게는

비켜서 일을 준다. 가장 편안하게 일도 안하고 성과금은 젤 높이 받는다. 


그러면 안 되는데, 힘들 수록 자꾸 그런 사람들이 더 더 미워진다. 자꾸 비교의 잣대를 들이댄다.


쪼잔하게 투덜대는 내가 못마땅해진다.


같은 동료는 부장과 교감의 정신적 괴롭힘에 병가를 냈다.

그리고 어떤 동료는 어쩔 수없이 휴직을 했다.

강사가 들어온 자리의 과외업무는 또 남아있는 책임감있는 누군가가 배분받는다...

나는 투덜댄다..



직장은 그냥 내가 주어진 일을 하는 것도 벅찬데..

나는 자아실현을 하기 위해 정말 직장을 다니고 있는 걸까?

나를 위해 무엇을 실현하고 있는 걸까?

소모되는 느낌의 보상이 월급일까?


코로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힘든데,

내가 경제적인 걱정을 덜 수 있는 소박한 직장을 가진 것 만으로도,

그래서 당장 아이들을 굶기지 않을 근거가 되는 이 일이

감지덕지 해야하는데


요즘 도무지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나는 왜 일을 하는가.


분명 수업은 즐겁지만. 수업만 하며 다닐 수 있는 직장이 아니다.

나는 이 일터에서 어떤 자아실현을 하며 다니고 있는 것일까.


열심히 다녔는데,

다니다 보니 알 수가 없다.




똥꼬 빠지게, 눈알 빠지게

전교생의 생기부를 점검했는데,

또 오류가 무더기로 나왔다.

고치라고 알려드린 것도 안 고친 샘도 있었고,


한반에 무더기로 기입을 잘못한 샘은

자기도 문제지만, 제대로 봐주지 않는 옆반 담임, 부담임, 생기부 담당자 모두가 문제라고 했다.

나는...그렇게 열심히 보고 고치고 전달하고 했는데..

어디가 문제인 것일까.

나보고 자꾸 개선하라는데..

어디서 부터 해야할지 엄두가 안낸다.


그들의 불만을 듣고 있노라면,

그리고 자꾸만 나오는 오류들을 보고 있노라면.


자괴감만 든다.

덩이 덩이 자괴감이

너는 그동안 도대체 뭘했느냐고 묻는다.


이게 내 자아실현에 무슨 득이 될까 싶다가도.


매일매일 공부를 하고, 배움의 터에서 여러 공부를 할 수 있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렇게 내 자리에서 선한 영향력을 조금씩 전파하면 좋지 않을까 싶다가도...


집에 와서 아이들 하원해서 밥 먹이고 씻기고 집을 치우다 보면,

그 자괴감은 사라지고

그냥 좀 자고 싶어진다.

그리고 다음날이면 어느 시인의 말처럼 하루하루 낡은 하루를 반복한다.




일을 하면서 끊임없이 자아를 성찰하게 되는 것은

 어쨌든 진리다.


도대체 내가 하고 싶은, 살고 싶은 삶은

그래서 뭔데?

일은 왜 하는데?

왜 나만 계속 제자리걸음 하는 기분인데...?

투덜이가 되고 싶지 않은데..입 닫자..

하루하루 반복되는 도돌이표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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