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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다리딩 Mar 08. 2021

봄날의 동물원 나들이는 감정의 불편함으로 끝났다

 큰 맘먹고 동물원에 갔다. 아이들이 제법 컸고, 둘째는 생애 첫 동물원 나들이기에. 아이들은 읽고 싶은 책 가져오라고 하면 동물 백과사전을 가져오기에.


내가 만났던 코끼리

 유년의 한 조각을 꺼내보자면 우리 안의 커다란 코끼리를 만났을 때 충격이 남아 있다. 코끼리는 육지 동물 중 가장 크다고는 하지만 어느 정도일지 조그만 시골마을에 사는 나로서는 감히 상상이 되지 않았던 듯하다.

 기차 타고 버스 타고 택시 타고 그렇게 도착한 대구의 한 동물원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저만치 우리에 갇혀 있는 코끼리를 만났었다. 지금의 우리 첫째 아들 나이에.

 코끼리는 힘차게 긴 코를 이리저리 휘저었고, 널따란 우리 안을 꽉 채울 정도로 무지막지한 덩치만큼 존재감을 바구 뽐내고 있었다. 숨 막힐 듯 많은 사람들을 하얗게 지워버릴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그렇게 집으로 와서 매일 밤 꿈에서 코끼리를 만났다. 어떨 땐 악몽이었고, 어떨 땐 신나는 모험이었다. 좀 더 커서도 대구의 한 동물원 우리 안에 살던 코끼리는 종종 꿈에 나왔었다.


아이들이 만난 동물들

 아이들은 그야말로 동물원에서 신이 났다. 유모차도 없이 동물원을 두 바퀴 돌았다. 아직 추운 봄바람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외투를 벗어던지고 호랑이며, 사막여우며, 토끼며, 독수리며, 표범이며... 동물들을 가까이에서 마음껏 탐미하고 관찰했다.


"엄마! 티브이에서 봤던 그대로야! "


아이들은 다큐멘터리에서 종종 봤던 동물들을 직접 봤다는 감동을 안고 신나했다.


집으로 돌아와 내 유년의 코끼리 이야기를 꺼냈더니 아이들은 한심하다는 듯(가끔 그렇게 날 깔본다)

 "엄만, 코끼리가 제일 크지~ 몰랐어?" 한다.



첫째가 세 살, 네 살 무렵 코끼리가 있는 동물원을 두 번 갔었다. 어렸을 때의 감동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한 동물원에서는 아프리카 코끼리가 무척 아파 보였고 우리는 좁아 보여 쓸쓸했었다. 좀 더 커서 간 동물원에서는 커다란 코끼리가 이상한 행동을 했었다. 우리 끝쪽 (왜인지 모르지만 철망으로 그 부분만 막아 놨었다) 철조망 쪽에서 자꾸만 머리를 부딪혔다. 코끼리의 이마는 멀리서 보아도 빨간 생채기가 뚜렷하게 보였다. 아들은 코끼리가 왜 그러지? 왜 자꾸 저기에 막 부딪히는 거야? 아프게? 하지 마~ 하지 마! "


아들은 수많은 다른 동물들은 잊어버리고 집으로 와 계속 코끼리 이야기를 했다. 피가 난 코끼리를, 네 살 눈에도 좁아 보이는 우리를, 집으로 가고 싶어 하나 봐, 불쌍해를 반복하며 말했고, 아프고 화가 난 코끼리가 꿈에서 나왔다며 새벽에 자꾸 잠에서 깼다.

검색해 보니 코끼리의 그런 행동은 태적인 환경이 아닌 환경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동물들이 하는 자해의 한 형태라고 했다. 그 뒤로 아이들과 동물원 나들이는 자제하기로 했다. 유난히 타인의 감정에 예민한 첫째 아들은 동물원 나들이의 좋은 점보다 그렇지 않은 점을 더 받아들이는 듯해서였다.


좀 더 컸으니 괜찮겠지, 싶었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동물원에서 받은 감동을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첫째는 하얀 도화지에 네모를 먼저 그렸다. 그리고 그 네모 안에 꽉 차게 동물을 그리기 시작했다.


"후야, 기린은 없었잖아."


"응. 나는 기린이 제일 보고 싶었는데 없었어. 그래도 뭐 우리에 갇혀 있겠지!"

그리고는 우리 없이 그린 동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동생아~ 우리에 다 가둬놔야지. 밖으로 나오면 안 되잖아. 이렇게 네모로 다 가둬놔!"


머리가 멍했다.

내가 생각했던 동물원 나들이 그림이 아니었다. 이제 어차피 동물들은 인간들과 공생할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멧돼지, 도라니, 뱀 같은 산짐승들은 민가의 삶에 어떤 식으로든 피해를 주거나 위협이 된다. 점점 야생의 터를 줄여 인간에게 편한 방법으로 자연은 개발이 되고 야생의 생명들은 터를 뺏길 것이다.


어린 시절의 나처럼, 감정에 예민한 아들들은 동물원을 다니며  갇힌 다는 것, 생태적인 환경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의 이미, 자유를 선택할 수 없는 흐름 속에서의 생명의 권리 같은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나와 완벽하게 다른 종이 가지는 신비함을 느끼기 위해 수족관 동물원을 다녔던 어린 시절에 동물이 주는 감동과 함께 불편함도 생각하게 되겠지.


아니나 다를까, 아들은 다시 아프리카 초원의 동물들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며 이렇게 말한다.


"엄마, 왜 저 동물들은 아프리카에서 자유롭게 막 뛰어다니고, 우리가 본 동물들은 왜 동물원에서 살아? 걔네들은 동물원이 좋대?"


설거지를 하다 적절한 대답이 어려워진 나는 허공을 바라보며 눈알을 굴려본다.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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