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마음은 그토록 가난하였으니...

젊은 연인, 그리고 나의 사랑.

by 다다리딩

한껏 멋을 낸 젊음을 감상하는 일이란 이질감이 느껴지고 때론 경이롭기까지 하다. 이층 테라스에 앉아 멋내기에서 이제는 한 걸음 멀어진 내가 그들 각자의 개성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따뜻한 11월의 햇살을 받으며 걷고 있는 한 쌍의 연인들이 시선을 사로 잡았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커다란 안경, 오랫동안 햇볕을 못 본듯 생기 없이 창백한 얼굴, 부스스한 머리. 둘은 구분이 안갈 정도로 똑같은 검은 색 패딩을 입고 검은 색 가방을 메고 있었다. 책으로 가득 차 금방 찢어질 것 같은 불룩한 가방까지 똑같은 그들은 두리번 거리며 어디로 들어갈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은 좀 행복해 보였다.


'좋겠다. 나는 왜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못했을까.

사랑 따위 사치라고 생각했을까.'


그들이 뿌리고 간 여운을 잡고 나는 커피를 한 모금을 잔득 삼켰다.


"저 때쯤 당신은 어땠어?"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나에게 남편이 묻는다.

스무살 무렵, 이십대의 나.


커피는 언제나 시작을 알리는 알람이었다. 이제 오늘의 공부 시작. 도서관 자리를 맡기 위해 오늘도 화장은 생략, 머리는 질끈 묶어 위로 올렸다. 아침 일찍 나오고 밤 늦게 돌아가니 11월이라고 해도 검은 색 패딩을 벗지 못하겠다. 아무리 껴입어도 추웠고 아무리 먹어도 늘 허기졌다. 공부가 안되는 날은 마구 이것저것 먹었고,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화장실로 달려가 먹은 것을 토해버렸다. 울고 싶지 않았지만 눈물이 한 번 나면 그냥 두 눈을 질끈 감고 소리 내지 않고 계속 울었다. 내가 너무도 형편없이 생각되어서.

그러나 정말 사실은 이 레이스에 이길 자신이 없어서.

돌이켜보면 작은 시도와 그에 따른 성공의 경험이 너무도 오래 되어 과거의 영광은 빛바랜 기억이 되었다. 마치 없었던 일처럼, 나의 일이 아닌 착각의 조각처럼. 성인이 된 나는 나를 가장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 강하고 능력있어 믿을 만한 사람에게 의지해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을 무렵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나간 소개팅에서 그런 사람을 만난 것은. 그는 집까지 바래다주며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작가가 꿈이라고 했지? 잘 어울려. 너와.

넌 정말 그 꿈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아."

마음 속에 가로등 불이 하나 둘, 셋. 은은하게 자꾸 켜졌다. 아무도 봐주지 않았고 그렇기에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되던 내가, 어렵게 꺼냈던 소망의 말들이 비웃음으로 찌그러지는 것에 익숙했던 내가 그 순간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으로 부풀어 올랐다.

"넌 정말 재밌어. 만나면 진짜 시간 가는 줄 모르겠어. 특별해."

그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자 내 존재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멋진 남자가 날 좋아하다니, 나는 어쩌면 꽤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기분좋은 상상이 시작됐다.


그가 좋아졌다. 나를 알아봐주는 사람을 만났다는 기쁨에 그날부터 가슴이 뛰어 공부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연애가 시작되자 신경 쓸 일이 많아졌다. 핸드폰 요금, 옷과 화장품, 데이트 비용. 참 많은 부분이 시간과 돈에 연결 되어 있었고 그 사실이 늘 나를 위축되게 만들었었다.

그와 약속이 없었던 8월의 주말, 동생과 옷을 사러 나갔다. 많이 걸어 발바닥이 화끈 거릴 무렵 수많은 인파 속에 낯익은 그가 두둥실 떠올랐다. 그는 다른 여자와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맞은 편에서 걸어 오고 있었다. 순간 나는 뒤돌아 서서 뛰기 시작했다.


그가 나를 보게 된다면 우리는 헤어질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예쁘지도 멋있지도 않다.

그들 앞에서 나는 초라하기 싫다.

나는 그 앞에서 늘 자신이 없다.

나는 사랑이라는 것을 하기엔 여유도, 자신도 없다.

스스로를 아낀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알고보니 스스로를 비루하다 여기며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를 좋아할수록 약자가 되는 내가 싫다.

오롯이 '나'를 있는 그대로 그에게 보여주는 것이 두렵다. 그래서 더 위축되고 피곤하다.

아마 나는 그와 오래 만나지 못할 것 같다.



골목길로 몸을 숨기고 나서야 씁쓸함과 허무함이 한꺼번에 밀려와 마음이 아팠다. 나는 정말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매 주말 집으로가 얼마 전 연달아 불어 닥쳤던 불행을 수습해야 했고, 코 앞의 임용고시에 희망을 걸어 제 앞가림은 해야했다. 나는 졸업을 코 앞에 두고도 그 어떤 스펙도 자신감도 없었다. 그와의 약속을 앞두고 빈 지갑 때문에 만날 수 없다고 솔직하게 말할 배짱도 없었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좋아해줄까?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의 열등감으로 인해 사랑의 게임에서 패자가 될 확률이 높다.

그것이 그와의 짧은 만남에 대한 결론이었다.




도서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을 하기로 했다. 집에 갑자기 닥친 불행은 마음을 쓸수록 내가 할 수 있는 바가 없음이 확실해져 갔다. 그 무렵의 나는 작은 성공의 경험들이 간절히 필요했다. 내가 쓴 글은 여러 공모전에서 아예 처음부터 보내지지 않은 것처럼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버렸다. 나만 읽는 글. 이젠 나도 제대로 자신이 없는 글 대신 취업을 선택했을 무렵이었다.


작은 일과에 집중해 온 마음을 다한 날, 조금씩 행복해졌다. 별다른 일은 없었지만 몰랐던 것을 알게되는 즐거움이 나를 평화롭게 했다. 매일 같은 자리, 같은 시간에 시작되는 공부.


일 년이 지난 9월의 어느날 그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 도서관으로 나를 만나러 왔다. 그렇게 옆자리에서 하루 종일 공부를 하다 헤어질 때 그는 무심하게 말했다.


- 다시 시작하지 않을래?


- 음, 나는 지금 여유가 없어.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야.

내가 시험에 합격하고 그리고... 나면

다시 오빠를 찾아갈게.




자존심이 강해 다른 사람의 말에 마음이 쉽게 다쳤던 나는, 자존감이 낮아 결국 타인의 말로 모래성 위에 자신을 세웠다. 그러다보니 상황에 따라 쉽게 허물지고 그의 말로 인해 자주 흔들렸던 나였었다.

끊임없이 눈치보고 주위를 서성였던 나.

찌질해서 마음 속에 하고 싶었던 말, 입밖에도 꺼내지 못하고 배려라고 포장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던....

언젠가는, 언젠가는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사람 앞에서든

당당한 사람이고 싶었던 나.


그와 헤어지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이른 새벽 공기를 주워 담으며 걷는 길에 자주 상상해 보았다.

작은 사회적 명함이라도 가지게 된다면... 내 목소리를 가지게 될까.

예전 그가 다른 여자와 손 잡고 걸었던 그 곳에서, 숨지 않고 다가가 놀란 그에게 지금 이 상황 뭐야, 라고 당당하게 물을 수 있을까.

옷차림이 초라하다고 오늘은 안 예쁘니 일찍 헤어지자고 했던 그에게, 고작 그런 하찮은 마음과 눈으로 만나고 있는 거냐고 호통칠 수 있을까.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만나지 않는 대신 오늘은 내가 돈이 없으니 오빠가 맛있는 저녁을 사면 알바비가 들어오는 날 내가 통 크게 쏘겠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십 대의 나는 그렇게 나의 목소리를 찾기 위한 작은 긍정의 상상들을 쌓아가며 도전하고 있는 시험에 최선을 다했다.


그런 시간들을 길고 길게 지나고서야 조금씩 나의 생각과 마음을 정확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순간이 서서히 찾아왔다. 아주 느리고 게으른 걸음으로. 그제서야 기다렸다는 듯 지금의 사랑도 다가왔다.


20대에는 나는 그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기만을 바라며 성숙하지 못한 자세로 어떻게 마음을 나누는지 몰라 동동거렸었다. 그렇게 초라한 시간들 속에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으면 결국 그 터널을 벗어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었다. 아들러의 말처럼 나를 가로 막는 것은 언제나 나였다.




-나? 그냥 지금이랑 좀 많이 달랐었지.

근데 나는 지금이 더 좋아.

그 시절 만남은 결국 스스로를 사랑하기 위한 긴 여정이었던 것 같아.

있잖아. 나 사랑해줘서 고마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아껴줘서. 당신의 사랑이 나 스스로를 더 사랑하게 만들어줘. 그게 참 편안해. 나의 사랑도 당신에게 그랬으면 좋겠어.


남편이 웃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년같은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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