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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림 Jan 05. 2023

오늘이 그날

문장소감 365 #day5


1.

그날

진은영

처음으로 시의 입술에 닿았던 날
내가 별처럼 쏟아져 내리던 날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환하고도 어두운 빛 속으로 걸어간 날

도마뱀을 처음 보던 날
나는 푸른 꼬리를 잡으려고 아장아장 걸었다
처음으로 흰 이를 드러내고 웃었던 날
따스한 모래 회오리 속에서
두 팔을 벌리고 빙빙 돌았던 날

차도로 뛰어들던 날
수백 장의 종이를 하늘 높이 뿌리던 날
너는 수직으로 떨어지는 커튼의 파란 줄무늬
뒤에 숨어서 나를 바라보았다
양손에 푸른 꼬리만 남기고 네가 사라져버린 날

누가 여름 마당 빈 양철통을 두드리는가
누가 짧은 소매 아래로 뻗어 나온 눈부시게 하얀 팔꿈치를 가졌는가
누가 저 두꺼운 벽 뒤에서 나야, 나야 소리 질렀나
네가 가버린 날

나는 다 흘러내린 모래시계를 뒤집어 놓았다


<시집, 우리는 매일매일, 문학과지성사>





진은영 시인은 언제나 좋다. 신선하게 반짝이는 언어의 감각이 좋다.


이 시 '그날'을 읽을 땐, 나에게 '그날'은 언제였을까를 더듬게 했다. 그날을 떠올려 봐. 지금 스스로를 흔들어 깨우라고 조용히 격려하는 힘. 내 어깨를 토닥이고, 나란히 걷는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시다.


일생을 걸고, 명운을 다 걸고, 헌신하게 될 일을 시작하게 된 '그날'은 언제였을까. 시인이 시의 입술에 닿았던 날처럼.

어떤 사람은 구두를 만들고, 어떤 사람은 노래를 짓고, 어떤 사람은 길 잃은 짐승들을 돌보고, 어떤 사람은 누군가의 성장을 독려하고, 모두가 지금 소중하게 간직하는 나만의 일, 인연을 시작한 그날, 마음을 처음으로 품은 날, 스스로가 그 시작을 안 날. 그날이 있었다. 있고, 있을 것이다.


한편, 나의 그날은 왔을까? 과거가 아니라 지금, 오늘일지도 모르겠다. 그날이 떠오르지 않거나, 아직 그 일을 만나지 못했다고 의기소침할 필요는 없다. 마지막 시구 '나는 다 흘러내린 모래시계를 뒤집어 놓았다'에서 끝은 또 다른 시작이라는 뫼비우스의 띠가 연상된다. 인생의 회전목마처럼. '오늘 나는 운명 같은 일을 하고 있는가', '운명 같은 사람을 만났는가' 묻다가 멈췄다. 그날은 과거에도 있었던 것처럼, 오늘도 있었고, 내일도 있을 것이다. 시인이 '도마뱀을 처음 보던 날처럼' 어떤 것들은 처음 보게 되고, 어떤 것들은 새롭게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날'을 기록으로 남길 것이다. 오늘은 '기록'을 남기기로 한 '그날'이다. 명운을 다 써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쓸모인지 가늠하지 않은 채 중얼거리는 이 '기록'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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