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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림 Oct 17. 2022

나도 이젠 월요일이 싫어졌어요

직딩일기

'나도 이젠 월요일이 싫어졌어요'

요즘 슬럼프를 겪고 있다는 상사의 솔직한 고백이다. '축하합니다. 드디어 평범한 직장인 수준이 되었군요' 회사와 일을 사랑하는 상사의 슬럼프에 진지한 조언도 물론 도움이 되겠지만, 안심감을 먼저 전해주고 싶었다. 지극히 일반적이고 정상인 상태니, 너무 깊이 빠지진 않길 바라며.


그리고 무수히 많은 월요일을 저주하며 꿋꿋이 15년 이상 일을 이어가고 있는 나 자신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글로벌 금융위기 시기에 취직하여, 중국 덕분에 호황기를 누려 국내 준중형 세단 한 대 값 정도의 인센도 받아보았다. 그러나 흥망성쇠의 주기는 길지 않았다. 다시 중국과 관계가 경색되면서 경기 한파를 먼저 겪었고,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원가상승, 유가상승, 환율상승, 물가상승, 금리인상, 급여 동결, 말만 들어도 숨 막히는 단어들 속에서 마음이 편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더욱 꿋꿋이 일어나 출근하는 모두에게 응원을 보내고 싶은 월요일이다.  

그리고 미래의 나에게, 우리에게 이런 편지를 남기고 싶다.


우리는 잘 정착했어. 두 발을 땅에 단단히 딛고 자리를 잡았지.
일상은 꽤 규칙적으로 흘러 가.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해. 양치를 하고 난 뒤에 정수된 물을 한 잔 마셔. 몸이 정화되는 느낌이야. 내가 준비가 되면 강아지가 내 곁에 어슬렁어슬렁 걸어와.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앉아 나를 올려 봐. 자기 차례라는 거지. 신장이 안 좋은 강아지를 위해 특별식 사료를 준비해 둔 상태야. 아 심장약도 복용 중이야. 강아지가 약을 먹기 편하도록 p.a 라는 습식 영양식은 늘 구비해 둬. 특별식 사료와 섞어 약을 양념처럼 솔솔 뿌려주지. 이때 강아지에게도 신선한 물 한 잔을 같이 제공해.
깨끗한 옷을 입고, 사원증과 스마트폰, 립밤 정도를 간단하게 작은 가방에 넣은 뒤, 집을 나서.
어디 가냐고? 당연히 회사지.


나를 녹인 1/3의 시간
나는 꽤 열심히 지속적으로 회사생활을 이어 왔어. 올해로 이 회사에서만 13년 째야. 10년 근속 휴가도 보냈고, 삼십 대에 입사하여 어느새 사십 대가 되었지. 나의 삼십 대 1/3이 이곳에서 녹았어. 신입 아닌 신입으로 선배들 눈치를 보며, 쭈뼛거렸던 게 어제 같은데 말이야. 매년 비즈니스 사업계획을 12번 세우고, 12번 평가를 받고, 12번의 창립기념을 보내고, 12번의 연말을 보냈지. 우리가 굴린 보잘것없는 성과가 변화라는 봄빛에 녹고 있어.


떠날 때가 되었을까
월요일은 여전히 부담스럽지만, 이상하지. 시간이 흐를수록 회사에 다니는 시간이 소중해. 선배가 그러더라. 너 떠날 때가 되었구나.

회사 정문, 회전문을 통과해 들어설 때 마주하는 로비가 오늘따라 인상 깊어. 가운데가 5층 높이까지 뻥 뚫린 상층부 개방감이 압도적인 공간이지. 로비 바닥엔 해외 유명 가구사의 독특한 디자인의 의자가 섬처럼 배치되어 있고, 그 주변으로 트로피컬 한 녹색 나무들이 화분에 심겨 작은 군집을 이루고 있어. 아름다운 무인도처럼. 좀처럼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은 곳이지만 5층에서 내려오는 자연광만큼은 은혜로운 곳이지. 빛으로 세례라도 받는 경건한 기분으로 270도 시야각에 들어오는 정경들을 둘러보며 사무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로비를 가로지르는 이 시간을 사랑하게 됐어

어제도 가로질렀고, 내일도 가로지를거야 그런데 내년 이 시간에도 여길 가로질러 사무실(=연옥)올라가는 동쪽 엘리베이터를 타게 될까? 이런 생각을 하며 사람들이 각자의 사무실로 올라가는 모습을 눈으로 따라가 봐. 저 사람들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할까. 그렇만 이런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아. 최근 바뀐 로고 장식이 시선을 끄는 셀린느 미니백이 눈에 들어왔거든. 스타일 좋다. 블랙 슬랙스는 마르지엘라. 저 사람 꽤나 명품을 좋아하나 봐. 이 회사에서는 종종 스타일이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어. 같은 급여를 받지만 소비의 규모도 스타일도 다 달라.


아직은 아닌가 보다
앗! 잠깐 저 앞에 상무님이 가고 계셔. 갑자기 다음 주에 있을 보고 압박감에 심장에 5톤 트럭의 무게감이 느껴져. 시간대를 아무래도 잘못 고른 거 같다. 오늘 동쪽 엘리베이터는 포기하는 것이 낫겠어. 누군가는 이럴 때 달려가 인사라도 드리고 스몰토크를 시도하며 본인을 어필하겠지만 나는 아니야. 해변가의 칠게가 왕발 집게를 만난 것처럼 뻘밭의 숨구멍으로 숨고 봐. 서쪽 엘리베이터로 급선회. 업무와 상사로 스트레스를 받는 걸 보니 나 아직은 떠날 때가 아닌 걸까.


우린 지금, 잘 정박 중이야
팝업 되는 생각 풍선을 잔뜩 달고, 어느새 사무실. 오늘 하루도 여기서 8시간 이상을 보낼 거야. 업무용 노트북 전원을 켜고, 회사 네트워크에 접속해, 메일을 먼저 확인할 거야. 그리고 실적을 뽑을 거고. 오늘 업무 리스트를 정리해. 아! 커피, 커피 먼저 마셔야 해. 두뇌가 돌아가지 않잖아. 카페인이 필요한 때야. 자리를 박차고, 회사 5층이든, 지하든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곳으로 다른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할, 신속한 속도로 움직여.
선배가 그러더라. 회사 안이 정글이면, 밖은 아예 화성이라고. 영화 마션 봤냐고. 지독한 외로움과 척박한 생존환경과의 사투. 그게 회사밖에 현실이라고. '선배, 너무 겁주는 거 아니에요?'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니까.' 퇴사를 지나치게 핑크빛으로도, 암흑으로도 볼 필요는 없어. 중요한 건 지금이야. 그날은, 그날이 오면 생각하면 돼. 미래의 나, 그리고 우리들에게 우린 지금, 잘 정박해 있는 중이야. 커피도 다 마셨고, 이젠 업무를 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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