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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림 Oct 30. 2022

그, 헤르만 헤세씨


전쟁이 일어났다. 오래지 않아 나의 불만과 우울증의 원인을 더 이상 찾을 필요가 없었다. 이제 아무것도 치유될 수 없지만, 이 지옥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 스스로 만든 우울함과 환멸을 치유하는 훌륭한 치료법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헤르만 헤세, 정원 가꾸기의 즐거움, 반니)




주말에 독립서점에 갔다가 헤세의 '정원 가꾸기의 즐거움'을 구입했다. 에세이집이었다. 청소년 필독서로 십 대 시절 그의 소설을 몇 권 읽었지만 에세이는 처음이다. 에세이는 작가가 살아온 현실세계를 보여주고, 한 인간으로서 친밀감을 느끼게 한다. 섬세한 내면 묘사와 '자아성찰'이라는 주제의식이 헤세 소설의 특징이라고 밑줄 그으며 달달 외운 것이 엊그제 같다. 그때는 그를 그저 독일 문학계의 큰 별로 여겼는데, 이번에 읽은 에세이집에서 변화하는 시대에 흔들리는 한 인간을 만나게 되었다.  



서른 살에 이미 문학으로 크게 성공하여, 경제적 자유를 얻은 헤르만 헤세는 보덴호숫가에 아름다운 집을 짓고, 정원을 가꾸며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한동안 전나무와 호수로 둘러싸인 사유지 내, 좋아하는 꽃과 나무들로 정원을 가꾸는 일에 열정을 불살랐던 서른 즈음의 그를 상상해 본다. 부럽다. 마흔이 넘어서도 직장생활에 매여 매일 아침 출퇴근에 시달리고, 상사에게 지시를 받는 처지. 그런데 헤세는 평온하고 안락한 일상이 주는 행복이 영원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어느 순간 집이 더 이상 편하지만은 않아 여행을 하며 이국을 유랑했다고.


눈 덮인 장엄한 알프스 산자락 아래서,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숨 쉬는 거 자체가 기쁨인 달콤한 공기 속에서도 원인 모를 슬픔에 시달린 것을 보면, 그는 우울증 또는 방랑벽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살 충동을 느끼며, 언젠가 그의 손가락 마디 하나를 거의 다 잘라낼 뻔했던 주머니칼을 만지작거리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칼은 풍요로웠던 시대에 소유했던 것들 중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은 마지막 순간까지 소유했던 유일한 것이기도 했다. '괴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가슴에 스스로 칼을 꽂지는 못했다'는 고백은 그가 얼마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괴로워 했는지를 느끼게 한다.



그러다 전쟁이 일어났고, 헤세는 '안락한 삶'이라는 괴로운 가위눌림에서 깨어났다. 삶은 서서히 몰락하여 묵지근한 고통으로 흔들렸다. 고향을 떠나 가족과 헤어지고 이웃나라로 망명하는 일들이 한꺼번에 벌어졌다. 역설적이게도, 헤세는 우울로부터 치유되지는 못했지만, 전쟁이 주는 고통(이별, 파괴, 망명, 그리움) 속에서 다시 터전을 이루는 것에 대한 꿈을 갖게 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가족, 집, 정원을 잃고 빈털터리 문인이 되어 우유와 쌀과 마카로니로 근근이 끼니를 때우며 12년을 카사 카무치라는 곳에서 보냈다고 한다. '다시 터전을 이루어야 한다, 정원을 가꿀 것이다, 가족을 이룰 것이다.'는 희망과 글쓰기가 그를 버티게 하였다. 그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성공한 문학인으로 추상화했던 헤세의 삶은 생생한 변화와 고통의 연속이었다. 망명 중, 겨울밤이면 난로 앞에서 선물과 편지를 불태우며 자신의 삶의 야망, 허영, 지식, 자아가 송두리째 불타 재가 되는 것을 지켜보는 그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뜻밖에 헤세씨를 만나게 해 준 에세이, '정원 가꾸기의 즐거움' 녹색 표지를 쓱, 손으로 훑어본다. 아침햇살처럼 반짝이는 문장들 속에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정경만 펼쳐지던 것 아니었다. 이른 성공과 짙은 허무, 그리고 전쟁으로 겪은 불가항력의 변화가 문학이라는 그의 정원 안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것만 같다. 그의 고백처럼 위대한 문학은 '영웅도, 현자도 아닌, 그저 솔직한 한 인간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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