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서림 Oct 31. 2022

화장기 없는 얼굴이라 못 알아본 건 아닙니다

글쓰는 직장인

"톰슨가젤님!

식사하러 내려온 사내식당에서 누군가 반갑게 내 이름을 불렀다.

"아, 아, 네, 네"

누구지? 못 알아보았다.

'아아아! 안녕하세요."

상대방이 민망해할까 봐 평소보다 목소리를 1.5배 하이톤으로 높이고, 정중히 목례했다. 그렇지만 누가 봐도 못 알아본 태가 난다.



나와 반대쪽으로 걸어가던 상대방이 몸을 틀어 내 쪽으로 성큼 걸어왔다.

"뭐야. 왜 못 알아봐요. 화장 안 했다고 못 알아보는 거야! 나 예나예요."

"에! 예나씨?"

목소리가 이상하게 갈라져서 상황은 더 뒤죽박죽. 그 예나씨라고?


예나씨는 십여 년 전에 신입사원으로 당시 내가 소속되어 있던 팀에 일원으로 합류했다. '인간 복숭아'라 부를 만큼 상큼하고 발그레한 투명한 볼미소눈부신 사람이었다.


예의 바르면서도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사람이라, 몇 년은 선배인 나는 예나씨가 미팅 시간에 의견을 제시할 때면 감탄하며 지켜보곤 했다.


나도 예나씨도 당시 소속팀에서 이동하여 지금은 다른 팀에 소속되어 있다. 내가 먼저 마케팅 쪽으로 팀을 옮겼고, 몇 달 뒤 예나씨가 상품개발 분야에 지원했다고 들었다. 그때 예나씨가 팀 이동 관련 조언을 구해 와 몇 마디 나눴던 기억이 난다.


예나씨는 수월하게 이동했고, 얼마 뒤 신제품을 출시하는 등 옮긴 팀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암튼, 뭐든 똑 부러지게 한다니까. MZ세대의 프로 일잘러 같은 사람이라고 할까. 특히 처음 출시한 제품이 SNS 입소문을 잘 타, 매출 성과까지 뚜렷해 제품 담당인 예나씨도 덩달아 사내 유명인이 되었다.  


내가 예전에 예나씨와 같은 팀이었다고 하니까, 옆자리 동료가 '그 사람 인스타에서도 꽤 유명해요.'라고 했다. 여섯 다리 건너면 미국 대통령과도 아는 사이라는 인간 네트워크 시스템 내에서 내 옆자리 동료가 이전 팀 동료인 예나씨를 안다는 것은 그렇게 놀라운 사실은 아니었다.

'인스타에서 꽤 유명하다고요?" 예전 같은 팀 소속일 때, 우리는 SNS 유명인사가 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지, 이것도 나의 섣부른 단정일 수 있어. 그렇게 들어간 인스타에서 내가 알던 예나씨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고 눈이 저절로 크게 떠졌다.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지금은 꽤 일반인에게도 확산되었으나, 당시로는 전문 체육인만 도전한다는 바디 프로필이었다. 파스텔톤 블라우스와 베이직 컬러의 H라인 미니스커트가 깔끔하고 정갈했던, 기억 속 과거  예나씨 이미지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고 자신감 있게 보디라인을 뽐내는 현재의 예나씨가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우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방 조명으로  보디 실루엣만을 강렬하게 드러내는 사진이라던지, 승모근, 능형근, 날개를 이제 막 펴내려는 듯 생동감 있게 살아 움직이는 등을 멋지게 드러내고 찍은 사진들은 압도적이었다. 예나씨 언제 이런 변신을... ... 입이 조금쯤은 헤 벌어져서 스크롤을 계속 내리고 있었다. 앗! 나 좀 변태 같은데.


예나씨의 변신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얼마 뒤 제품 개발 부서를 떠나 라이브 방송 부서로 옮겨갔고, 그곳에서 사내 방송인으로 거듭났다. 소셜 플랫폼 커머스에 라이브 방송이 막 이식되던 초창기였다. 예나씨가 라이브방송 부서에서 도전한 직책은 기획이나 편집, 작가가 아니었다. 방송 전면에 나서 제품을 소개하고 시청자와 소통하는 쇼호스트 역할이었다. 몇 번 예나씨의 방송을 보고 깔끔한 진행과 세련된 외모에 빠져들어 보고 우리 회사 제품을 내돈내산 지를 뻔했다. 셀링 파워가 있었다. 그렇게 예나씨는 사내 유명인사로 인스타에서도 팔로워 수를 늘려가고 있었다.


같은 팀일 때는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고 식사도 많이 했는데, 소속팀이 달라진 지난 3~4년 간 예나씨를 사석에서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 오늘 식당에서 만나고 '나 예나예요!'하는데 놀라서 뒷걸음친 것이다. 무슨 일인지 오늘 예나씨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편안한 회색 니트 베스트에 흰색 셔츠를 받쳐 입고, 검은색 모직 미디스커트를 입었다. 신발은 톤온톤으로 블랙 스니커즈. 가을 오피스룩 추천 해시태그와 잘 어울릴 것만 같은 룩이었고 나도 재질이나 컬러감이 완전히 똑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몇 벌 가지고 있는 구성이었다.


그래서 알아보지 못했구나. 몇 년 전, 저장해둔 예나씨의 스타일과 달라서. 마스크도, 화장기 없는 얼굴 때문도 아니었다. 내 기억 속 예나씨 모습이 라이브 방송 속 화사한 아이보리 컬러 셋업 정장과 피치톤 메이크업, 물결 웨이브가 치는 긴 머리, 한 톤 높게 조율된 전달력 뛰어난 목소리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오늘 본 예나씨는 신입사원 때와도, 라이브 방송 속 이미지와도 달랐다. 예나씨는 맡은 업무와 이미지 연출을 잘 매칭하는 사람이었다. 오늘은 방송 스케줄이 없는 모양이다. 편안한 가을 오피스룩이 잘 어울리는 예나씨, 오랜만에 반가웠어요.

작가의 이전글 그, 헤르만 헤세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