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세쯤 돼 보이는 할아버지께서 내가 누른 번호의 번호표를 들고 내 자리로 오셨다. 통장을 잃어버렸다는 고객님. 뭐 한 두 번도 아니라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고객님, 그런데 통장 없어도 만기 때 오시면 저희가 만기해지처리 해드리니까 걱정하지 말고 만기 때 연락드리면 그때 오세요~!"
사실 고객이 통장을 들고 오지 않으면 만기 해지 때 시간이 걸릴 뿐 만기 된 예금을 못 찾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예금이라는 게 1년이고 2년이고 처음 예금해 두고는 중간에 안 찾았다가 만기 때나 찾는 거라서 만기 전까지는 통장이 딱히 필요가 없다. 적금이 아니니 매달 돈이 잘 들어갔는지 통장을 찍어볼 일도 없어, 통장을 잃어버린 게 그리 큰 일은 아니다.
"아니야, 그래도 있어야지. 통장 잃어버렸는데 어떻게 하지?"
괜찮다고 해도 통장을 만들어달라는 고객님. 어르신들은 통장이 실물로 있어야 안심을 하신다.
"알겠어요 고객님. 그럼 새로 만들어드릴게요."
사실, 어르신들은 통장에 돈이 찍히는 걸 봐야 마음을 놓으시는 경우가 많다. 요즘 아무리 시대가 전산으로 다 하는 시대라고 하지만 그분들은 그렇게 살아오셨기 때문에 그래야 하는 거다. 나도 그걸 잘 알기 때문에 이럴 경우, 더 말하지 않고 일처리를 해드리는 편이다. 그렇게 그 고객님은 새로운 통장을 만들고 가셨다.
일주일 후.
"띵동"
"103번 고객님~! 어! 고객님 오셨어요?"
5천만 원 예금해 놓은 통장을 잃어버리셨다던 그 할아버지다. 저번에 통장을 새로 해드렸는데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을까.
"예금 이거 2개가 만기 된 것 같아서 왔어. 한번 봐봐"
할아버지의 손에는 통장 2개가 들려있었다. 우선 만기가 된 게 맞는지 통장을 받아봤다.
"고객님, 이거 만기가 오늘이 아녜요. 모레니까 모레 오셔야 해요. 지금 해지하시면 안 돼요."
그런데 자세히 보니 두 개의 통장이 모두 같은 계좌였다. 하나는 처음 예금할 때 만들어드린 통장. 또 하나는 통장을 분실했다고 하셔서 내가 얼마 전에 만들어드린 통장. 같은 계좌인데 통장만 2개를 갖고 계신 것이었다.
"고객님, 이거 만기 아니라서 지금은 해지하시면 안 돼요!"
"그럼 이건 뭐야? 이것도 아직 만기 아니야?"
"이거랑 이거랑 같은 통장이에요. 잃어버렸다고 하셔서 제가 얼마 전에 만들어드린 거잖아요. 헷갈리시니까 이전 통장은 제가 파기할게요. 새 통장만 가져가세요. 갖고 가셨다가 모레 오세요."
나는 고객님이 헷갈리실까 봐 이전 통장은 파기하고 새로 만들어드린 통장만 드렸다.
이틀 뒤.
고객의 업무를 처리하고 있는데, 그때 그 할아버지가 오셨다. 다른 고객이 앞에 있는데도 막무가내로 내 앞에 오셔서 말씀하셨다.
"내 돈 내놔. 5천만 원 어디 갔어! 5천만 원이 없어졌어!"
무슨 말인지 당최 알 수가 없어서 일단 먼저 오신 고객님의 일처리를 끝내고 도와드리겠다고 했다. 할아버지의 말씀은 그거였다. 내가 파기한 통장에 들어있던 5천만 원이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혹시나 해서 고객님의 동의를 받고 예금을 다 조회해 봤지만 예금은 5천만 원뿐이었다. 5천만 원짜리 예금이 2개 있는 것이 아니라 5천만 원 예금 1개만 있는데, 할아버지는 통장을 잃어버려서 재발급한 기억은 잊어버리시고 통장 2개만 기억하시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각각에 5천만 원이 들어있다고 생각하신 것이었다.
"고객님, 5천만 원 이거 하나예요."
"니가 내 5천만 원 버렸잖아! 어디 갔냐고!"
"제가 예금을 버린 게 아니라 그때 그거 2개가 같은 통장이라서, 옛날 거는 고객님 헷갈리실까 봐 제가 파기한 거잖아요."
"무슨 소리야 거기에도 5천만 원이 있었는데!"
"아니 근데 그게 같은 계좌였다니까요?"
아무리 설명해 드려도 믿지 않으시는 할아버지. 하지만 방법은 없다. 계속 설명을 드리는 수밖에. 안 그러면 내가 5천만 원 훔친 도둑이 되게 생겼으니까! 끝없는 설득 끝에 처음에는 내 말을 듣지도 않던 할아버지를 겨우집에 보내드렸다. 만기 된 5천만 원만 재예치했다.
문제는 며칠 뒤에도, 그 뒤에도 할아버지께서는 계속 찾아오셨다는 것이다. 아무리 집에 가서 생각을 해봐도 5천만 원이 빈다는 말씀이셨다. 그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할아버지께 설명을 드리는 것뿐이었다. 내가 뭘 할 수 있겠나 싶었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설득했던 날이었나. 그날도 역시 할아버지께 수도 없이 반복했던 설명을 또다시 드렸다. 그리고마지막으로 여쭈었다.
"그래서 아버님, 이제 집에 가시면 저녁식사하시는 거예요?"
"그럼, 먹어야지. 때가 됐으니."
"그럼 누구랑 드세요? 어머님이랑 드세요?"
"아니 혼자야."
"그럼 자녀분이 있으세요?"
"아들 둘 있지. 하나는 교통사고로 벌써 옛날에 죽었고, 하나는 병 걸려서 병원에 누워있어......"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너무 놀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그제야 할아버지께서 오실 때마다 나던 알코올 냄새와 담배 냄새가 이해가 됐다. 어떻게 맨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었겠는가. 감히 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아픔과 슬픔을 느끼고 계시겠구나 싶었다. 당신이 통장을 잃어버려 내게 새 통장을 만들었을 당시에도 맨 정신이 아니셨을지 모른다. 아니, 80세 할아버지가 그런 일을 겪으시고 지금 예금이라는 걸 하고 있다는 것이, 정신을 차리고 살고 있다는 게 기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진심으로 듣고 공감했다. 가슴 아픈 이야기에 온 마음으로 아파했고 힘내셔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예금도 안전히 있는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없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다. 안심하신 할아버지는 내 이야기를 듣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셨다. 처음으로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였고 그간 나를 괴롭히셨던 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 할아버지는 찾아오지 않으셨다. 어쩌면 그동안 은행에 오신 것이없어진 예금 5천만 원을 따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프고 힘든 자신의 속을 이야기하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 조금 더 일찍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내가 너무 죄송스러웠다.
한참 지나서 할아버지께서 한 번 오셨다. 병원에 있던 아들이 죽었다고 했다. 오셔서 무슨 업무를 보셨는지는 기억도 안 난다. 그냥 할아버지와 나, 옆의 동료들까지 안타까워했던 기억밖에 안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