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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대리 Jul 31. 2023

두 개의 십만 원

 추석이나 설과 같은 명절이 되면 은행은 바빠진다.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인출하러 은행을 방문하기 때문이다. 특히 설날이 되면 평소보다 많은 고객들이 돈을 찾기 위해 은행을 방문한다. 부모님이나 손주, 자녀, 조카들 세뱃돈을 주기 위함이다. 아무리 전산이 보편화되고 계좌이체로 돈을 주고받는 시대가 됐다고 하지만 설날에는 어른에게 세배를 하고 예쁜 봉투에 세뱃돈을 받는 게 제 맛이다. '세배를 하고 그 자리에서 계좌이체로 세뱃돈을 받는다?' 아무리 머릿속으로 그려봐도 이상하다.

 설날에는 특히 돈 중에서도 "신권"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사용감이 없는, 이제 막 찍혀 나온 빳빳한 신권 말이다. 그래서 은행에서도 명절을 앞두고 미리 신권을 구비해 둔다. 하지만 너도 나도 신권을 찾다 보니 각 은행에 배분되는 신권 한도가 정해져 있다. 1인당 고객에게 나갈 수 있는 금액에도 한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신권을 많이 원하는 고객들과 그만큼 줄 수 없는 은행 사이에 마찰이 생기기 마련이.


 해 설 명절에도 나는 신권과의 전쟁에 시달리고 있었다.

 "띵동"

 "154번 고객님!"

 어느 할머니 한 분이 내 앞에 앉으셨다.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돈 찾으시게요?"

 "응, 이십만 원만 빼줘요."

삐뚤빼뚤하지만 정성스럽게 "이십만 원"이라고 적은 할머니의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오만 원권으로 드릴까요?"

 "응, 편한 대로 줘."

 그날 그 고객님이 오시기 전까지 내가 만났던 대부분의 고객님들은 앉자마다 신권을 달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할머니는 신권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으셨다. 뭐지......?

 "고객님, 이거 혹시 손주들 세뱃돈 주시려고 하시는 거예요?"

 "응, 손주가 군대에 갔는데, 이번 설에 휴가를 나온대요. 그래서 나오면 십만 원 용돈 주려고 그러지."

 휴가 나와서 할머니 뵈러 가는 군인이라. 내가 다 기특하기도 하고 잠시지만 어렴풋이 내 군대생활이 떠오르기도 했다. 아마 십만 원은 세뱃돈 주시고 나머지 십만 원은 당신이 쓰려고 하셨던 모양이다.

 "그럼, 고객님. 제가 십만 원은 신권으로 드릴게요. 그럼 나머지 십만 원은 그냥 개인적으로 쓰시려고 찾으시는 거예요?"

 그러자 할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아니, 우리 손주가 군대 후임 하나랑 같이 이번 명절에 휴가를 나온대. 근데 그 후임의 고향이 부산이래요. 휴가는 이틀인가 사흘밖에 안 되는데 부산 왔다 갔다 하면 남는 시간도 없잖아. 그래서 우리 손주가 후임이랑 같이 나와서 우리 집에서 쉬다 들어가기로 했어. 내가 손주 세뱃돈 십만 원 챙겨줄 건데, 그 후임도 챙겨줘야지. 우리 손주만 챙겨줄 수는 없잖아요. 큰돈은 아니지만 그렇게 해주면 그래도 그 후임은 군생활 중에 소중한 추억 하나 생기는 거 아니겠어? 그래서 챙겨주려고 십만 원 더 찾아요."

 가슴이 뭉클했다. 십만 원. 그 안에는 자신의 손주를 향한 마음뿐만 아니라 고생하는 후임도 생각하는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이 담겨있었다. 후임은 또 어떨까. 남의 집에서 신세 지는 것만으로도 죄송하고 감사할 텐데, 설이라고 선임의 할머니께 용돈까지 받는다니. 얼마나 가슴이 따뜻해지겠는가. 정말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이지 않을까? 액수는 십만 원이지만 할머니의 마음, 그리고 후임이 받을 감동은 금액으로 매길 수 없을 만큼 값진 것이 생각이 들었다.

 "고객님, 그럼 나머지 십만 원도 신권으로 드릴게요. 후임도 신권으로 줘야죠."

 "아이고 고마워요.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되는데. 후임이 좋아하겠네요."

 "아닙니다. 한 사람당 신권 교환할 수 있는 한도를 넘지도 않으셨는데요. 후임 꼭 가져다주시고 잘 챙겨주세요, 고객님."

 나는 예쁜 세뱃돈 봉투 2개와 신권 이십만 원을 챙겨서 할머니의 손에 쥐어드렸다. 따뜻한 할머니의 온기가 손에서 느껴졌다. 그리고 신권이 이렇게 값지게 쓰일 수 있음에 기뻤다.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설 명절이 지나고 며칠이 지나서였다. 설이 지나고 나면 은행은 또다시 분주해진다. 설에 받은 세뱃돈을 입금하러 오는 고객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날도 받은 세뱃돈을 입금하러 오는 고객들로 은행은 북적였다.

 "40번 고객님. 1번 창구로 오세요."

 "안녕하세요. 나 기억해요?"

 설 명절 전에 손자와 후임에게 세뱃돈을 준다며 신권을 가져가신 할머니셨다.

 "어! 네! 네! 기억나죠. 그 후임 주신다고 십만 원 더 찾아가셨던 분!"

 반가운 마음에 큰 소리로 대답했다. '네'를 몇 번이나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사람이 진심으로 사람을 대해야 한다는 걸 느꼈어요."

 "왜요? 후임이 좋아하던가요? 엄청 좋아했을 것 같은데."

 "좋아하다마다요. 후임이랑 내 손주랑 세배하고 난 그때 선생님이 챙겨준 세뱃돈 줬어요. 3일 동안 닭도 삶아주고, 맛있는 거 많이 해줬는데 둘 다 아주 맛있게 잘 먹더라고. 잘 먹는 거 보니까 뿌듯했지. 우리 손주가 나이가 더 많은지 그 후임이 형! 형! 하던데, 재밌게 놀다가 잘 들어갔어요."

 말씀하시는 할머니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며칠이 지나서 택배 같은 게 왔어요. 정말 커다란 상자 같은 거였는데 거기에 여기서는 보기도 힘든 진귀한 각종 해산물이 잔뜩 들어있더라고. 아주 귀한 해산물들이 들어있었어요. 그 후임이 휴가 끝나고 부대로 들어가서 부모님한테 얘기를 했다더라고. 선임 할머니가 너무 잘해주셔서 푹 쉬고 왔고 용돈도 받았다고요. 그랬더니 후임 부모가 너무 고마웠던 거야. 집만 가까웠으면 군대에서 고생하는 아들 휴가 나왔을 때 이것저것 해먹이고 용돈도 주고 싶었을 텐데 그렇게 못했잖아. 그걸 내가 해줬으니 감사하다는 거야. 그래서 고맙다고 그렇게 보내줬어요. 집이 부산이라고 귀한 해산물들로 보내줬어. 참 사람이라는 게 진심으로 행동하면 그 진심은 늘 통하게 돼있더라고요. 내가 이번에 다시 한번 그걸 느꼈어."


 진심은 통한다는 말을 난 원래 믿지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 세상은 상대방에게 진심으로 대해도 그걸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는 걸 봐왔고, 준만큼 돌아온다는 건 동화 속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걸 살아오면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매일 신문에는 사기 치다가 붙잡힌 이야기, 돈에 눈이 멀어 남의 진심도 파는 이야기가 매일 업데이트되지 않는가. 그런데 그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이 세상의 한 편에서는 이런 따뜻한 일도 일어나긴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틀렸다.

 흔히 하는 말, "그래도 아직 세상은 살 만하다."

 아직은 맞는 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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