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숏폼의 시대입니다. 버스, 지하철, 집 등 언제 어디서나 사람들은 1분 남짓 영상을 쉴 새 없이 넘겨보며 파편화된 콘텐츠의 풍랑을 휘젓고 다닙니다. 볼 게 많아졌다고 의식이 풍부해지고 확장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맥락이 절제된 일부의 콘텐츠만 반복적으로 보게 되니 외려 요즘 사람들은 역사상 가장 많은 것을 보면서도 가장 단편적인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요즘 사람들이 '알고리즘'이라는 나침반을 손에 쥔 채 숏폼의 바다를 항해한다는 점이 더욱 치명적입니다. 알고리즘은 사용자의 취향에 맞게 콘텐츠를 추천해 주기 때문에 사람들을 더욱 편향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이러한 연유로 숏폼을 보면 볼수록 사람들은 더욱 외골수가 되어 갑니다.
물론 숏폼은 재밌습니다. 저 역시도 가끔 숏폼 영상을 하나둘 보다가 2시간이 훌쩍 지나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근데 그럴 때마다 느끼는 점은 2시간 동안 정말 많은 것을 봤는데 딱히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굳이 기억에 남은 것들도 단편적인 정보들이다 보니 영양가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의식적으로 책을 읽습니다. 제가 책을 읽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첫 번째 이유는 책을 통해 여러 저자와 만나다 보면 자연스레 의식이 확장되다는 점이고, 두 번째 이유는 숏폼과 달리 책은 기승전결의 맥락이 있기 때문에 긴 호흡의 사고를 할 수 있는 훈련이 된다는 점입니다. 저는 직업이 마케터이다 보니 기획을 할 일이 많은데 이처럼 기승전결의 맥락을 만드는 것이 기획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역량이므로 커리어적인 생존을 위해서라도 저는 숏폼 노출을 줄이고 독서를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독서의 효용에 대해서 제 나름의 의미를 찾은 와중에 이를 뒷받침해 줄 반가운 문장들을 책 속에서 발견했습니다. 철학자 강신주 님은 자신의 저서 <철학이 필요한 시간>에서 독서의 의미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저는 책이란 알지 못하는 누군가로부터 받은 편지와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습니다. 저자는 1000여 년 전의 사람일 때도 있고, 어느 경우에는 저와 같은 시대에 살고 있으나 아주 먼 곳에 살고 있는 사람일 때도 있습니다. 엄청난 시공간을 넘어 책이란 매체를 통해서 저자가 저와 접속되었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저도 책을 읽는 것이 누군가 저에게 보낸 편지처럼 느껴진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에 공감하며 위안을 얻을 때도 있었는데 그 편지의 작성자가 1000여 년 전의 사람인 경우에는 왠지 경이로운 마음까지 생겨났습니다. 무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러 사람들이 보낸 편지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제 의식의 범위는 현세에 갇히지 않고 더 넓은 범주로 시공간을 초월하여 확장할 수 있다는 점이 독서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평론가 허지웅 님은 자신의 저서 <버티는 삶에 관하여>에서 독서의 의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책을 읽지 않으면 내가 아는 것들 사이에 연결고리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저는 이 말에 십분 공감했습니다. 독서를 하다 보면 알고 있는 것들이 자연스레 연결되고 이로 인해 의식이 확장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그런데 숏폼은 아무리 봐도 그런 경험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애초에 숏폼은 맥락이 절제된 콘텐츠의 파편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오늘도 책을 읽습니다. 1000여 년 전의 사람에게 편지를 받기 위해서, 제가 아는 것들 사이에서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해서. 그리하여 내가 아는 것들을 연결하고 맥락을 만들어 시공간을 초월하여 의식을 확장하기 위해서 말이죠.
오늘의 인문학 짝짓기
<철학이 필요한 시간>, 강신주 저
<버티는 삶에 관하여>, 허지웅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