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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_이슬 이야기

이슬은 태양을 사랑했습니다

by 구의동 에밀리

이슬은 태양을 사랑했습니다.


이슬은 매일 아침 저희 집 베란다 화초 이파리에 맺혔습니다. 아무래도 식물은 자연 그대로 사는 쪽이 좋다, 그렇게 어머니는 말씀하셨고, 저희 집은 겨울이고 여름이고 간에 베란다 바깥 창문은 어느 정도 살짝이라도 열어놓고 살았습니다.


이슬을 본 건 초봄 쯤이었습니다. 어떻게 그 많은 물방울들 중에 그 이슬을 알아보았냐구요? 그렇게 커다란 방울로 늘 똑같은 자리에 맺혔다가 사라졌으니까요. 그것도 매일 햇빛이 가장 잘 들어오는 자리에 나타났습니다.


이슬은 태양을 사랑한댔습니다. 태양도 너를 사랑하니, 라고 물으면, 그럼이고 말고요, 라고 말했습니다. 해가 들기도 전에 증발해버려서 없어지는 걸, 태양을 이슬은 본 적도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랑한다고 말하는 표정이 마치 꿈꾸듯이 순수해 보여서, 저는 그 얘기까지만 듣고는 같이 미소 지어주고, 동이 터오는 새벽하늘을 한 번 보고는 학교를 갔습니다.


이슬은 매일 같은 자리에 나타났습니다. 어쩌면 저리도 꾸준할까, 하루는 또 다가가서 말을 걸어보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파리에서 아주 작은, 귀를 쫑긋 세워야만 하고 시곗소리만 들리도록 조용한 새벽이래야만 알아챌 수 있는 작은 흐느낌이 있었습니다. 이파리가 울 리는 없고, 맑고 투명한 목소리를 보아하니 이슬이었습니다.


저는 다가가 물었습니다. 이슬아, 왜 울고 있니? 저, 태양이 저를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단 한 번 만이라도, 황금빛 마차를 몰아오면서 동을 틔워오는 태양이, 저를 보며 웃어주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이슬이 불쌍해서 한 번 토닥여주고 자리를 떴습니다. 그 날 밤 꿈에 저는 끝없는 모래사장에 서 있었습니다. 하늘에는 둥그런 태양 하나만 떠 있었습니다. 구름도 새도 없는 멀건 하늘 아래로, 시리게 푸른 파도만 모래사장을 들락, 날락, 쓸고 있었습니다.


다음 날 저는 한 가지 생각이 나서 이슬에게 말했습니다. 아, 어쩌면 저는 그 귀띔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후회는 않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그렇게 될 운명이었는지도, 혹은 오히려 슬픈 운명을 행복한 운명으로 스스로가 바꾼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슬은 그 날도 눈물 고인 눈으로 보라색 새벽 하늘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는 가장자리에서부터 점점 증발해 가면서도 안간힘으로 버팀으로써 주위 이슬들보다 겨우 조금 더 오래 남아있는 이슬이, 그렇게 처량해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이슬아, 혹시 너는 서리로 내릴 수도 있니? 네, 그럼요. 한 번도 서리가 되어 본 적은 없지만, 저는 알고 있어요. 이슬아, 얼음은 쉽게 수증기로 날아가버리지 않는단다. 서리로 나타난다면, 어쩌면 좀 더 오래 기다려 볼 수 있을 지도 몰라.


정말요? 라고 물어보는 이슬의 눈은 기쁨으로 반짝였고, 곧 동이 트면서 이슬은 자신의 눈물과 함께 공기 중으로 사라졌습니다.


이튿날 아침은 봄같지 않게 무척 쌀쌀했습니다. 어머니는 화초에 냉해가 입지 않을까 우려하시면서도 바깥 창문을 열어두셨습니다.


저는 화초 이파리를 살펴보러 갔습니다. 조금 춥다고는 해도 분명 서리가 내릴 날씨는 아니었습니다. 이파리에는 여느 때처럼 이슬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슬의 자리, 그 곳에는 보석처럼 반짝이는 하얀 알갱이가 마치 신부처럼 얼굴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 태양을 볼 거에요, 밤새도록 준비했어요. 이슬의 볼은 평소보다 상기되어 있었고, 두 눈에는 설렘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새벽 하늘의 보랏빛이 점점 옅어져갔습니다. 뒤이어 희미한 연푸른색과 노란빛이 섞여갔습니다.


하늘빛이 이렇게도 아름다운 줄은 몰랐어요! 이슬은 환희로 가득찬 맑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이슬의 머리에 얹힌 하얀 장식에 물이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하늘빛을, 바로 태양이 만든단 말이지요!


이슬은 분명 온몸으로 버텨내고 있었습니다. 영롱한 얼음 표면이 바르르 떨고 있었습니다. 이미 다른 이슬은 다 걷히고 난 뒤였습니다.


저기, 저기 그의 황금마차가 보여요!


저는 그 날 태양의 황금마차를 보았습니다. 환한 빛으로 가득했습니다. 태양님, 저 여기 있어요! 이슬은 태양을 향해 외쳤습니다. 태양은 그러나 그 때까지도 오직 하늘로 더 솟아오르기 위해 고개를 위로 향할 뿐이었습니다.


!


제가 어렸을 때 들여다보던 예쁜 구슬이 자기 스스로 깨어진다면 그런 소리가 날까요? 아니면 신혼부부의 손가락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가 바스러진다면 들을 수 있는 소리일까요? 저는 그때껏 들어보지 못했던 가장 맑고 가냘픈 소리를 들었습니다. 드디어 태양이 제 자리를 찾아 온 세상으로 햇빛을 내리기 직전, 이슬은 얼음으로 버티던 제 몸을 끝내 녹이지 않은 채 산산이 깨어져버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깨어지기 직전, 이슬의 표정을. 이슬은 행복에 취한 듯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태양을 보았어요, 그리고 태양도 저를 보았어요, 그도 저를 사랑한다고 속삭여주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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