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주 3일
맨날 누워서 지내다 보니까 사람이 축 처지려고 했다.
원래 내가 생각했던 임신 후기의 모습은 이런 게 아니었다. 혼자서 카페도 가고 요가원도 가면서 씩씩하게 지내려고 했는데!
유퀴즈에 나온 산부인과 선생님은 임산부도 일반인처럼 운동도 하고, 다른 하고 싶은 것도 다 하면서 지내야 한다고 하셨기 때문에 내게 이 상황은 의외의 전개였다. 하긴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은 상황일 수는 없으니까.
자궁경부가 버티는 힘도 시력처럼 사람마다 천차만별인 모양이었다. 누구는 유치원생 때부터 안경을 써야 하는 반면, 누구는 핸드폰 맨날 보는 데도 양쪽 시력이 1.0 이상을 유지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아무렇게나 지내면 사람이 더 처질 것만 같아서 나름대로 하루 루틴을 만들어서 지내고 있다. 아래는 기록으로 남겨 두는 요즘의 루틴!
1) 일어나서 아침 정비
# 조명 켜기
우선은 침대맡에 조명을 켜는 것으로 아침을 시작한다. 하루 종일 누워 있다 보니 천장에 달린 형광등을 켜 두면 눈이 부시다. 그래서 침대 양옆에 조명을 하나씩 두었다. 나중에 아이가 태어났을 때도 웬만하면 천장 형광등은 자제할 수 있도록 주의해야겠다. 그 친구도 눈이 부시겠지?
# 이불정리
하루 종일 침대에서 보내야 하니 우선은 이불을 개어 두고 시작한다. 대신 낮 동안에는 예전에 투썸플레이스에서 랜덤 박스 상품으로 받은 담요를 덮곤 한다. 패딩 같은 질감이라서 몸에 달라붙지 않기 때문에 뒤척거리면서 덮어도 편리해서 좋다.
# 식사 준비
아침을 꼬박꼬박 먹는다. 목표는 7시에 일어나서 아침을 먹는 것인데, 아침잠이 많은 날에는 9시 반에도 일어나서 아침을 먹는다. 그릭 요거트와 사과, 키위를 먹는다. 예전에는 호두와 시리얼을 부어서 먹었는데, 변비 탈출을 위해서 섬유질이 많은 과일들로 바꿨다. 변비조차도 자궁 수축에 영향을 준다고 한다. 참 별게 다……!
# 방 문 열어두기
아침마다 안방을 포함한 모든 공간에 로봇청소기가 돌아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려면 난방을 때지 않는 아기방과 서재의 문을 열어 두어야 한다. 이 때 문을 열어 두면 안방부터 시작해서 청소가 시작되기 때문에, 로봇청소기가 돌아갈 때 쯤에는 안방에서 생활을 시작하고 있기 때문에 소음 걱정이 없다.
# 스터디 그룹 출석체크
‘열공시간’이라는 앱을 통해서 스터디 그룹에 참여하고 있다. 스터디 그룹이라고 해도 딱히 뭔가 같이 활동하는 것은 별로 없고, 출석 체크와 스터디플래너 인증, 공부 시간 인증 정도를 하고 있다.
하지만 때때로 게시판을 들어가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는지, 남들이 재미로 쓴 소설이나 TMI는 어떤지 눈팅하는 재미가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스터디플래너 인증을 하거나 일기를 쓰면 간혹 포인트도 방장님께서 지급해 주신다! 아무래도 집에 혼자 있으면 단절된 기분이 들 수 있는데, 그걸 방지하는 차원에서 정말 좋은 것 같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앱의 주된 사용증은 초등학생부터 중학생인 것 같다. 어린 친구들이 이 겨울방학에 하루 9시간 이상씩 공부하고 그 흔적을 스터디 플래너에 기록해서 올리는 사진들을 보면 나도 왠지 자극을 받는다.
2) 아침 운동
# 요가
식사를 마치고 양치질까지 끝내면, 침대에서 누워서 할 수 있는 요가를 한다. 내가 찾아서 따라하고 있는 유튜브 요가 영상은 아침을 여는 요가 느낌으로, 원래의 취지는 아침에 일어나서 바로 할 수 있는 가벼운 몸풀기에 가까웠다. 하지만 나는 앉거나 서서 운동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영상을 찾았다. 주로 팔다리를 위아래로 쭉쭉 뻗는 스트레칭이나 무릎을 구부린 상태에서 좌우로 가볍게 흔들흔들 하는 동작 정도로 구성되어 있다.
중간부터는 엎드려서 하는 코브라 자세 같은 게 있기 때문에 모든 동작을 할 수는 없어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끝낸다. 그래도 앞부분은 충분히 따라할 만하고, 처음 도입부나 마무리 멘트가 하루를 활기차게 시작할 수 있도록 응원하는 내용이라 이 부분도 생략하지 않고 꼬박꼬박 듣고 있다.
# 스트레칭
침상 안정을 취해야 하는 임산부들을 위해 만든 스트레칭 영상이 있어서, 요가 뒤에 이 영상을 이어서 본다. 영상을 만든 사람도 임신을 했을 때 침대에 누워있어야 해서 고생을 했고, 그때의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영어로 진행되는 운동인데, 유튜브에 ‘incompetent cervix exercise’라고 검색해서 나온 것 중 하나를 선택했다.
댓글들 중에서는 “누워만 있어야 해서 우울했는데, 의사 선생님께 여쭈어보니 이정도는 괜찮다고 말씀 주셔서 덕분에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라는 댓글과, “자궁경부 수술을 했으면 다리 벌리는 동작 등은 하면 안 되는데 위험한 것 같다”라는 식의 상반되는 댓글들이 있었다.
나는 두 의견을 적당히 수렴해서 쉬엄쉬엄 따라하고 있다. 내가 봤을 때 위험해 보이는 건 마음대로 생각도 하고 말이다.
# 고무밴드 10개씩 5세트
배뭉침을 방지하려면 물을 엄청 많이 마셔야 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물을 마시는 족족 화장실을 가게 돼서 문득 예전에 PT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근육이 없는 몸은 나무가 없는 산과도 같아서, 비가 왔을 때 나무 뿌리가 수분을 잡아 주지 못하면 바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근육량이 부족하면 몸에서 수분이 그대로 술술 빠져나가서 화장실을 자주 가게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누워있는 상태로는 하체 힘을 쓰는 운동은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고민이 됐다. 윗몸일으키기 같은 건 복압을 높이기 때문에 그런 동작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러다 몇 년 전에 받았던 운동할 때 쓰는 고무밴드를 발굴했고, 이걸 써서 상체운동이라도 하기로 했다. 양옆으로 고무밴드를 쫙쫙 늘리는 동작으로, 좁게 펼치기와 넓게 펼치기를 열 번씩 각각 다섯 세트!
그나저나 누군가가 누워있는 임산부를 위한 스트레칭과 운동 영상을 따로 만들어서 올려주면 참 좋을텐데 싶다.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영상들은 맨날 “의사 선생님과 상담하고 따라하세요”라고 해서 괜히 불안하다. 아예 어디 병원이랑 협업해서 그런 공식적인 영상을 만들어 올리면, 의사 선생님들도 고위험 산모들에게 추천할 수 있는 영상이 생기니까 좋지 않을까?
3) 집과 몸을 깨끗하게
# 샤워하기
아무리 집에만 있는다고 해도 되도록이면 샤워는 꼬박꼬박 하고 있다.
옛날에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쓴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는데, 더럽고 차가운 물일지언정 매일 샤워를 하던 한 수감자를 인상깊게 묘사한 내용이 있었다. 그 사람은 샤워뿐만 아니라 대인관계나 평상시 행동에 있어서도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그 모습이 왠지 의미심장해서 이따금 곱씹어보게 된다.
대신에 너무 오랫동안 서 있으면 자궁경부에 무리가 가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샤워하려고 한다. 15분짜리 플레이리스트를 틀어놓고, 노래가 끝나기 전에 샤워를 마치는 게 목표다. 병원에 입원하는 분들은 이틀에 한 번 바늘을 교체할 때 샤워를 하거나, 며칠 동안을 물티슈로만 겨우 몸을 닦는다고도 한다. 역시나 오래 서 있으면 안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 커튼 걷기
바깥과 통하는 유일한 문이 안방 창문이 되었다! 그래서 아침에는 커튼을 걷고 저녁에는 닫는 식으로 지내고 있다. 그래도 창밖 풍경을 가로막는 건물도 없고 나름 잠실 롯데타워도 보인다. 눈이 오면 눈을 볼 수도 있고~
4) 낮 시간 보내기
# 인터넷 강의 듣기
아침에는 아무래도 뭔가를 스스로 시작하기에는 부담스럽다. 그래서 수동적으로 들을 수 있는 인터넷 강의를 일단 켜고 본다.
요즘에는 일본어 강의를 하나씩 듣는다. 일본 여행 가기 전에 다 들으려고 했는데 결국 다 듣지 못해서 좀 남아 있었다. 물론 향후 몇 년 간은 해외 여행을 못 가겠지만, 그래도 하루 10분 내외의 강의를 무엇이라도 꾸준히 듣는다는 데 의의를 두고 있다. 엄청 짧지만 놀랍게도 듣고 나면 뿌듯하다……!
# 원고 퇴고하기
원래는 2월 정도에 출판할 수 있도록 에세이를 거의 매일 한 편씩 써서 인스타그램에 업로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몸 상태가 책상 앞에 앉아서 노트북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보니, 다소 기약 없어진 감이 있다.
대신에 기존에 써 둔 원고를 PDF로 뽑아서 아이패드로 퇴고하는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다. 맞춤법이나 어색한 표현, 이상하게 찍힌 구두점 같은 것들을 애플펜슬로 수정하고 있다. 나중에 몸이 좀 괜찮아지면 노트북 작업을 휘리릭 하든가, 아니면 누워서 편하게 노트북을 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든가 하려고 한다. 지금은 노트북을 불편하게 쓰는 방법 밖에 알아내지 못했다…….
# 독서
누워있다 보면 아무래도 핸드폰에 손이 많이 가게 된다. 그런데 핸드폰을 한동안 보고 나면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책을 읽거나, 아니면 차라리 잠을 자든지 하려고 하고 있다.
덕분에 몇 년 동안 읽다가 말다가 했던 제인 오스틴의 <에마>도 다 읽었다. 어제(그제던가?)는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라는 에세이를 완독했다. 거의 개그물에 가까울 정도로 엄청 웃긴 에세이였다. 예전에 전자책 카페에서 다른 회원들로부터 추천 받은 도서 중 하나였는데, 그 추천 리스트들을 하나씩 도장깨기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참 신기하다. 뭔가를 읽거나 즐긴다는 처음에서는 똑같은 데, 책을 읽고 나면 인터넷을 뒤적거리거나 영상을 시청하는 것보다 훨씬 뿌듯한 마음이 든다.
# RPG게임
아무래도 집에만 있다 보니 바깥을 나갈 수 없어서, 산책하고 여행하고 싶은 마음은 RPG 게임인 <원신>으로 대신하고 있다. 한동안 플레이를 하고 나면 정말로 내가 직접 탐험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 블로그 포스팅
누워서 할 수 있는 취미생활은 정말 제한적이다. 하다못해 베이킹조차 할 수 없다니. 대신에 글을 쓰는 것만큼은 어느 정도 할 수 있다.
물론 키보드를 쓰기는 어렵긴 한데, 그래서 스마트폰의 음성인식 기능을 십분 활용하면서 글을 쓴다. 아무래도 사람이 직접 타이핑하는 것보다는 오타도 많이 나고 맞춤법이 틀릴 때도 많긴 하다. 띄어쓰기는 고사하고 ‘의’와 ‘에’를 헷갈리기도 하고, ‘게다가’라고 말했는데 무려 ‘걔다가’라고 받아쓰기도 한다.
그런 오탈자들을최대한 고치려고는 하지만 100% 잡아내기는 역부족이라서 어느 정도 수준에서 그냥 만족 하기로 했다. 어쨌든 덕분에 지금 쓰는 글도 누워서 음성인식 기능을 위주로 쓰고 있다. 현대 문물 만세! (물론 출산 이후인 지금의 편집 시점에서는 노트북으로 작업했다.)
심심해서 테스트를 해 봤는데, 갤럭시 빅스비 보다 아이폰 시리가 받아쓰기를 더 잘하는 것 같다. 갤럭시가 한국에서 만든 건데, 왜일까?
5) 저녁시간
# 남편과 도란도란
남편이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같이 식사를 한다. 남편은 낮 동안에 회사에 있기 때문에 이 때밖에 편하게 대화할 시간이 없다. 물론 낮에도 카카오톡을 보내면 되긴 하지만, 괜히 근무시간에 말을 걸기보다는 집에서 얼굴 보고 대화하는 시간에 더 충실하고 싶다. 그래서 낮에 생각난 대화 주제는 잘 메모해 두었다가 저녁 식사 때 이야기하곤 한다.
6) 하루 정리
# 하루 로그
밤 9시 반쯤이 되면 하루를 정리하는 의미에서 하루 동안의 기록을 스터디 그룹에 올린다. 다른 사람들은 보통 국어나 영어나 수학 같은 과목들을 하루에 얼마나 공부했는지 체크해서 올리던데 나는 그것보다는 그냥 하루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위주로 작성한다. 그러다 보니 낮잠이라든가 게임 같은 것도 있고……. 그래서 좀 화질을 낮추어서 올린다.
그래도 이렇게 하루를 정리하고 나면 내가 오늘 하루를 아주 헛되게 보내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 일기
스터디 그룹에 올리는 내용이 공개적인 하루 일과라면, 블로그에는 비공개 글로 일기를 올린다. 엄마가 차려주신 점심 밥상이나 남편과 먹은 저녁 식사, 그 날 게임을 하면서 갔던 지역 스크린샷 같은 소소한 사진들을 올린다. 여기에는 꼭 글도 같이 몇 자 적어 놓는다. 비록 누워서 지내기는 하지만 나의 하루하루가 헛되이 흘러가지는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그리고 이렇게 기록해놓고 나면 정말로 오늘도 충만하게 살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 숙면을 위한 바디 스캔
낮에 낮잠을 많이 자서 그런지, 아니면 단순히 임산부라서 그런지, 하여튼 밤에 잠이 한 번에 잘 오지 않는다. 어떨 때는 한 두 시간씩 뒤척이다가 잠들기도 했다. 그래서 바디 스캔 영상을 틀어놓고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처음 한두번은 바디 스캔을 하다가 잠들 정도로 효과 만점이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약발이 떨어지는 것 같다. 그래도 영상을 듣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져서 잠을 더 쉽게 청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