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개월 27일
어디 나갔다가 들어오면 집안일이 다 되어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퇴 후의 저녁이었다. 어쩌다보니 나는 육퇴 후에 해야 하는 집안일 리스트의 절반만 끝낸 채로 인터넷 서핑을 하고 웹툰을 좀 봤다. 그렇게 30분 정도가 흘렀을까? 시계를 보니 이미 밤 9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육퇴 후에 할 일들의 일부를 낮 동안에 부지런히 끝내둔 것이 허망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흘려보낼 시간인데, 나는 왜 그렇게 바삐 움직였던 걸까?
게다가 아직도 마치지 못한 집안일이 꽤 있어서 더욱 허무했다. 그렇게 하루를 분주하게 보냈는데도 할 일이 또 있다니. 내일 아가에게 분유에 타 줄 물도 끓여두어야 하고, 실리콘 큐브 틀도 식기세척기에 돌려야 하고, 침이 잔뜩 묻은 장난감들을 물수건으로라도 닦아줘야 하고…….
우리 집에는 집요정 도비도 없고, 남편은 아이를 재우러 들어가면 기본으로 2시간 정도 함께 자고 나오곤 해서 일을 대신 부탁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만약 1시간이라도 어디 밖에 나갔다가 들어온다면, 아마 집안일은 온전히 남아있을 것이었다. 빨래는 세탁이 끝난채로 세탁기에 그대로 들어있고, 장난감들도 침이 말라붙은 채 덩그러니 있을 것이다. 식탁과 설거지통의 식기에서 풍기는 잔반 냄새는 오히려 나가기 전보다도 더 심하게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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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도 해도 끝이 없는 육아와 집안일의 굴레에 사로잡힌 기분이 들었으나, 그보다 더 괴로운 점은 따로 있었다. 집안일을 어찌어찌 끝내더라도 그 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마땅치 않아 보인다는 점이었다.
독서나 그림 그리기 같은 취미 생활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프로그램 개발을 배운다든지, 블로그에 글을 쓴다든지, 그런 활동들도 어쩐지 해변의 모래성처럼 여겨졌다. 나의 내일을 눈곱만큼이라도 변화시켜줄 수 있는 일들이라면 좋을텐데, 그렇지가 않아 보였다. 모든 게 무의미하고, 단순히 화면을 반복적으로 터치하기만 하는 킬링 타임용 모바일 게임과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무언가를 배우거나 글을 쓰거나 할 때는 최소한 30분에서 1시간의 보장된 연속적인 시간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서 코딩을 배울 때는 2~3시간 정도가 필요했다. 그래야 인터넷 강의에서 알려준대로 실습하다가 예상치 못하게 접하는 에러를 구글링해서 고친다든지, 아니면 소개해주는 개념을 완전히 이해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라 매일 고작 30분씩 할애하는 식이라면, 날마다 노트북을 열고 ‘어디까지 했더라……’ 하면서 10분을 날려먹고는 남은 20분 동안 ‘지난번 그 에러는 오늘도 못 고쳤네’ 하고 끝나기 일쑤였다.
하지만 옆방에 아이가 자고 있는 서재에서는, 그렇게 한 가지 일에 연속적인 시간을 투입하는 게 불가능한 일처럼만 느껴졌다. 아이가 아직도 통잠을 자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밤잠에 입면하고 나서 오후 9시에서 11시 사이에 아이는 필시 두어 번 깨서 울었다. 운이 좋으면 한 5분 정도 앙앙 울다가 알아서 잤지만, 그런 날은 열 번 중에서 한 번 있을까 했다. 대체로는 ‘자다 깨서 울다가, 다시 자는 듯 하다가, 엎드리고 5초 후에 깨서 우는’ 패턴이 반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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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육아서적에서, 아이에게 수면 리듬을 타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 부모의 의무이며, 그 교육은 아이에게 기회를 줌으로써 가능하다고 말했다.
나 또한 동의하는 교육 방식이었다. 내 평소 지론과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학습이란 대개, 누가 말로만 옆에서 알려주거나 몇 번 시연 보여주는 것을 구경한다고 해서 이뤄지는 게 아니라고 믿었다. 안타깝게도 무릇 사람은 구렁텅이에 빠지고 허우적대다가 어찌저찌 빠져나옴으로써 탈출의 방법을 터득한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학습’의 찜찜한 진리였다.
특히나 언어로 교육이 불가능할 경우, 예컨대 몸으로 감각을 익혀야 하는 쪽에서는 더욱 그 성격이 강하고, 따라서 뭔가를 학습하려면 ‘얻어걸려서 배우기’의 방식밖에는 애석하게도 답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이른바 ‘수면교육’이라는 개념에 말없이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 탓에 아이는 아빠가 아니라 엄마로부터 수면교육을 받았다. 예외적으로 첫 번째 수면교육은 남편과 같이 있을 때였는데, 그 날은 45분간 울다가 잠들었다. 그 다음날은 18분을 울었다. 그 후로도 아이는 좀 울다가 알아서 잠드는 모습을 보여주며 밤중깸은 개선되어가는 듯 보였다. 아니, 이러면 될 일을 가지고 만6개월부터 7개월까지 두 달 동안 매일밤 온가족이 1시간마다 깨면서 지냈단 말이야?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남편이 아이를 달래주러 갔다가 본인이 같이 잠들곤 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여느 때와는 다르게 강성울음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사실 내가 보기에 아가는 늘 강성울음이었지만……. 어쨌든 그 바람에 수면교육이랄 것도 없이, 깨서 울자마자 곁에 잠들어 있던 양육자가 바로 토닥여주는 상태가 되어버리곤 했다. 그 때문인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지, 아이는 점차 밤중깸의 간격이 짧아지기 시작했고, 나는 몹시 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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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하루는 남편이 아기방이 아닌 안방에서 잠에 곯아떨어졌고, 아이는 어김없이 깨서 엉엉 울었다.
어째서 남성들은 아기의 울음소리에 둔감하도록 설계되었을까? 나는 홀로 한밤중에 1시간 45분 동안 홈캠을 노려보며 남편 곁에 누워 버텼다. 그러다 아이는 푹 잠들어서 아침까지 쭉 잤다. 아이가 우는 동안, 옆에 누워서 코를 골며 자고 있는 남편의 가슴팍을 마구 때리고 싶은 충동이 내내 일었다. 당신 때문에 아이가 수면장애를 겪게 되었고, 그래서 저리 목놓아 울고 있다고, 몹시 원망하고 싶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에는 남편이 회식이 있었다. 나는 서재에서 혼자 책상 앞에 앉아서 뭔가를 하려다가, 아이가 밤 열 시 쯤에 울기 시작하는 소리를 들었다. 홈캠을 보니 역시나 밤중깸이었다. 일부러 전자책을 켜고, 읽으나 마나 한 웹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그 외에는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20분이 지나고, 아이는 푹 잠들어서 새벽 다섯 시 반까지 쭉 잤다.
어쩌면 남편이 집에 있지 않았기에 혼자서 이를 악 물고 수면교육 모드로 버틸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있었다면 아마 10분, 아니 5분도 안 돼서, “너무 강성울음인데 가서 달래줘야 하지 않을까?” 하고 얘기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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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내가 육퇴 후에 무슨 일을 마음 놓고 할 수 있을까.
육퇴를 하고, 집안일을 마저 하면, 아무리 부지런히 굴어도 저녁 8시 반이었다. 서재에 틀어박혀서 뭔가를 사부작거리고 있다면, 30분에서 1시간 후에 아이가 깨어 울 것이 분명했다. 반드시 방해받고, 반드시 중단되는 상황이 예견되는데, 그런 환경에서 대체 나는 어떤 일에 도전하고 천착할 수 있을까?
아이가 울어제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평온하게 하던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지금의 내 일을 하는 것 또한 중요하니까’라든지, ‘만8개월이나 된 시점에서 수면교육을 하려면 2시간씩 울리는 일도 필요해’라든지, 그런 조언들을 부여잡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혼자였다면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채 주구장창 울리면서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방침을 가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곁에 있다면 나는 곧장 가혹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육아서도 읽고, 소아과 전문의나 수면 전문가들이 하는 말들도 많이 찾아 들었지만, 여전히 내가 비전문가라는 사실은 나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과연 내가 들은 것과 믿고 있는 바가 절대적으로 맞는지, 아이의 울음을 내가 제대로 해석하고 또 적절하게 대처하고 있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이래도 괜찮겠느냐고 누군가가 의문을 제기한다면, 그에 맞서서 밀어붙일 자신이 없었다. 특히 그 대상이 내게 전적으로 의탁하고 있는 나의 소중하고 작은 아기라서 더욱 그러했다.
물론 남편을 포함해서 가족 중 누구도 내게 직접적으로 뭐라고 말을 하지는 않았다. 매정하다든지, 그러면 안 된다든지, 하는 말들을 말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 붙인 자의식이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나는 단 두 개의 선택지만을 만들어서 자기 자신에게 고르라며 건넸다.
첫 번째 선택지는, 매정하기 짝이 없게도 “1시간이고 2시간이고 자기가 울다가 지쳐서라도 자겠지”라며 천사같은 아기에게 가혹한 밤을 선사하는 사이코패스를 자처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선택지는, 수면장애의 악화가 불 보듯 뻔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불편한 마음으로 남편에게 “그래 가서 달래주자”라고 동의하는 것이었다.
둘 다 싫었다.
싫은 선택지를 고르게 되는 나 자신도 싫었다. 그런 날이 반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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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육아를 하고, 저녁에는 집안일을 하고, 밤에는 불편한 마음으로 뭔가를 끼적거리다가, 애매하게 늦은 시각에 잠든다.
제대로 된 뭔가를 이루는 것 하나 없이,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간다. 물론 낮 동안에는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지낸다. 아이는 각별하게 귀엽고, 건강하고, 잘 논다. 기특하게도 요즘에는 내 쪽으로 기어와 머리를 비비는 등 애착을 끊임없이 보여준다(고양이인가?). 그런 작고 소중하고 따끈한 존재를 데리고, 집에서 밥을 먹여주고, 폭신한 매트 안팎에서 놀아주고, 카페에 나들이를 다녀오고 하는 시간은 무척 즐겁다. 하지만 그것이 요즘 생활의 즐거움의 전부다.
어쩌면 나는 굉장히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고, 이런 글을 쓰는 것 자체가 괜히 민망해진다. 만약 미혼모가 읽으면, ‘남편이 있어도 저런 불만을 토로하네’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픈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읽으면, ‘아이가 건강하기만 해도 소원이 없겠는데’라고 여길 것이다. 혹은 금전적으로 어려운 상태이거나 아이 양육 때문에 아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둬서 경력단절을 걱정하고 있는 누군가가 읽으면, ‘취미생활은 그냥 하면 될 일인데 별 걸 가지고 그러네’라고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도 다소 의기소침하고 무기력한 채로 밤은 다가와버렸다. 그리고 내일의 밤은 이렇지 않으리라는 보장 또한 도무지 없어 보인다. 오늘밤과 내일의 아침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는데. 마음이 무겁다.
* 표지사진 출처: Unsplash의 Beaz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