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개월 21일
자다가 벌떡 일어났다.
아이는 방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그 곁에는 아이 아빠가 함께 잠들어 있었다. 요즘에는 늘 이런 식이었다. 아이를 재우러 갔다가, 본인이 같이 잠들어버린다. 그리고 새벽 4시 쯤 깨어서 나온다. 덕분에 밤에는 수면교육이랄 것도 없이, 울면 곧바로 옆에서 토닥토닥하고 둘은 다시 잠들기를 반복한다.
그러니까 아이는 남편이 1대1 마크를 하고 있었고, 따라서 전혀 걱정할 게 없었다. 그런데도 갑자기 예전 생각이 나버렸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 숨을 곧바로 쉬지 못했던 기억, 그래서 병원 원장 선생님께서 등을 팡팡 때리고 겨우 “켁” 하고 숨을 뱉은 기억. 조산기 때문에 노심초사하다가, 출산한 날 밤이 되어서야 그간 외면하고 있었던 모든 걱정과 불안이 밀려와서 눈물을 쏟았던 기억.
그런 기억들은 끈질기게도 주기적으로 한 번씩 찾아와서 나를 건드렸다. 아마 앞으로도 그러겠지……. 그러나 지금의 아가는 무척 감사하게도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고 9개월을 버텨주었다. 어린이집도 문화센터도 보내지 않으면서 몸을 사렸던 것도 이유가 되었겠지만, 어쨌든 자식이 아프고 아프지 않고 하는 일은 노력보다는 운의 영역이 크다고 믿었다. 그러니 감사할 만한 일이었다.
어디엔가라도 감사하다고 기도를 드려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만 ‘오냐 기특하구나 앞으로도 잘 봐주겠다’ 하고 어떤 큰 힘을 가진 존재로부터 보살핌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무교이다 보니 이제 와서 예수님 하느님 부처님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출산하고 9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삼신할머니를 또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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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기간 내내, 나는 커다란 침대에 누워서 두어 달을 버텨왔다.
자궁경부가 너무 짧은 탓에 조산 위험이 있었다. 낮이고 밤이고 언제나, 화장실 가거나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계속 침대에 누워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밤마다 기도했다. 매일이 출산예정일인 사람처럼 살고 있는 내게, 오늘도 태중의 아가에게 하루치의 건강을 더 주신 삼신할머니께 감사드린다고. 그 속에는, ‘그러니 부디 내일도 잘 부탁드립니다’ 하는 바람이 담겨 있었다.
그런 식으로 나도 모르게 몇 달을 그 널따란 침대에서 삼신할머니께 매일 기도를 드렸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내게는 안방이라는 공간과 삼신할머니께 드리는 기도가 무척 익숙했다. 출산 후에도 아가의 건강이 염려될 때면 두 손을 모아서 기도를 드렸다. 하지만 삼신할머니는 대중적인 기도 대상은 아니었기에 남몰래 기도 드렸다. 남들은 하느님, 부처님을 찾는데, 토속신앙이라니. 그러나 내게 삼신할머니는 아가의 건강을 지켜준 유일한 신이었다.
나는 내가 믿는 신을 찾으며,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드렸다. 삼신할머니, 아가를 이 날 이때까지 건강하게 지켜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꼭 잘 돌봐주세요. 토속신앙에 기대면서 기도를 하고 있는 모습이라니, 어쩐지 남들에게 감추고 싶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눈물이 계속 나왔고, 나는 기도를 들어줄 신이 필요했다. 이 세상에 부모들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은 신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 괜히 떠올랐다.
아가는 건강했고, 그것이 눈물나도록 감사했다. 한편으로는 건강하지 못했더라면 어쩌나 싶어져서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아팠다. 그런 내 모습에 덜컥 겁도 났다. 나는 과연 내 아이에게, 엄하게 대해야 할 때는 엄하게 대할 수 있을까? 아이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몸도, 마음도, 아프지 않았으면. 울려야 할 때와 달래주어야 할 때를 구분할 수 있는 현명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과연 내가 그런 지혜를 늘 가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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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며칠 후, 친구들을 만나러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약속은 시청 근처에서 있었다. 2호선을 타면 금방이었다. 지하철역까지 가는 길에는 차가 많았다. 그런데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서 불이라도 났나? 뒤를 돌아서 목을 길게 빼보았더니 앰뷸런스가 차들 틈바구니에 끼어 있었다. 번쩍이는 초록불과 사이렌 소리에도 불구하고 앰뷸런스는 도로 가운데에서 적색 신호등에 멈춰서 있었다.
‘다들 조금씩만 옆으로 비켜서서 길을 터주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문득 예전에 출산했을 때의 기억이 또 되살아났다. 회사 동료분께서 일러주기를 ‘신생아 중환자실(NICU)이 있는 병원에서 출산하는 게 혹시 모를 위험을 예방할 수 있다’라고 하신 적이 있었다. 다니던 분만병원에 물어보니, 병원 자체에는 니큐가 없지만 바로 근처에 건대병원이 있어서 위급시에는 바로 앰뷸런스를 태워 보낼 수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날 때 울음이 없었다. 나는 사고가 마비되어 있었다. 놀라서 대체 무슨 일이냐고 외칠 법도 한데, 당시에는 고작 “아이가 왜 안 우나요……” 하고 물어본 게 전부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극도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현재를 외면하고 싶을 정도의 두려움이 오히려 나를 무디게 행동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나는 후처치를 위해 누운 자세 그대로 아이의 이름만 부를 뿐이었다. 목소리를 들려주면 태어난 아기가 안정을 찾는다는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루나야, 엄마야. 엄마 여기 있어……. 하지만 의료진이 전화로 앰뷸런스를 호출하는 말소리가 들렸다.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루나야, 엄마 여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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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원장 선생님께서 아이 등을 찰싹찰싹 연거푸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석션 소리 같은 것도 들렸다. 입 안의 이물질을 빼내는 걸까? 나는 이 상황이 받아들여지지가 않아서 멍했다. 아이는 왜 안 울고 있지? 분명 아기들은 태어날 때 우렁차게 운다고 하던데. 조산기 때문에 누워서 버티며 지냈던 날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아이의 꼬물락거리는 태동과, 배뭉침에 조산을 노심초사하던 밤들과…….
다행히 아이는 얕은 울음을 내뱉었다. 그렇게 내 아이의 첫마디는 “응애”가 아니라 “켁”이 되었다. 뭔가가 기도를 가로막고 있어서 울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의료진이 전화로 앰뷸런스를 호출 취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솔직히 속으로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놔두는 게 좋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에 마주친 앰뷸런스. 어쩌면 저 구급차에, 산부인과에서 니큐로 옮겨가고 있는 아기가 타고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내가 출산한 그 병원에서, 어떤 아기가 건대병원으로 황급히 이송되고 있는 게 아닐까? 구급차에는 아기 아빠도 타고 있을까? 아기 엄마는 아직 산부인과 수술대나 침대에 누워있을까? 그 엄마, 울고 있을까?
그런데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에도 차들은 옆으로 비켜서지 않고 있었다. 조금씩만 비켜서면 앰뷸런스 한 대가 지나갈 정도의 틈은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초록불이 들어오고 나서야 구급차는 달릴 수 있었다.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에, 나는 어쩐지 울고 있었다. 아무도 안 비켜줬어. 숨을 못 쉬는 아기가 타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나쁜 사람들이었다. 진짜 나쁜 사람들이었다. 혼자 눈물을 닦았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사연 있는 여자인 줄 알겠지. 연인이랑 헤어졌다든가, 뭐 그런 사연들. 그러니까 그만 울어야 하는데.
그런데 글을 쓰면서도 울고 있다. 이래서 아기가 어릴 때 아팠던 기억이 있는 사람들은 다들 얘기를 피하는구나. 입에 담는 순간, 잊고 있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면서 아픔이 되어버린다. 최대한 잊어보려고 노력하고,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기억에는 하릴없이 신을 찾음으로써 그럭저럭 대처해 나간다. 정말로 어떤 일들은 겪어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제 정말 그만 울자. 따지고 보면 앰뷸런스에 누가 탔는지 알 수도 없는 일이었다. 문지방에 발가락 찧었다고 엄살 부리는 50대 중년 남성이 타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이제 그만 발 닦고 자자. 내일 또 육아 해야지.
* 표지사진 출처: Unsplash의 Naassom Azeve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