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잘 자요

가오슝 여행기

by 구의동 에밀리

객지에서 잘 자는 편이다.


정확히는 이동수단에서 특히 잘 잔다. 해외여행을 떠나면 도착지까지 모든 탈것에서 숙면을 취한다. 우선은 공항 가는 버스나 지하철에서부터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대만의 가오슝으로 가기 위해 인천공항을 향했다. 동서울터미널역에서 KAL 리무진 버스를 타면 1~2시간 정도가 걸렸다. 바로 전날에 낮잠만 3시간을 잤던 터라, 버스에서 잠이 안오면 심심해서 어쩌나 싶었다.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도 잠실을 지날 때 쯤부터 숙면에 빠졌고 이번에도 남편이 나를 깨웠다.


“곧 있으면 제1터미널이야.”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를 타고도 또 잠이 들었다. 예전에는 이륙하기 전 기다리는 시간은 설레기도 해서 전혀 잠이 온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대기 시간은 물론이고 이륙을 할 때도 수면 중이다.


‘비행기 사고가 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은 뒷전이었다. ‘여기서 추락하면 다함께 어쩔 수 없는 거지 뭐’ 라는 식의 태평한 마음으로 기장에게 전적으로 모든 것을 맡겼다.


그렇게 1시간이 흐르고 나니, 몸은 개운하고 비행기는 상공을 날고 있었다. 잠을 깨려고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슬슬 남편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안 자고도 괜찮을까?’


여행 중 이동수단에서의 숙면은 습성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의도적인 선택이기도 했다. ‘여독’이라는 말이 있듯이, 여행을 위해 이동하다 보면 그 자체로 피로가 쌓이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바로 ‘여독은 쌓이는 즉시 깎아주자’였다.




비유하자면 마치 게임을 하면서 HP 게이지를 신경 쓰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보통은 캐릭터를 더욱 강하게 키울수록 기본적인 체력 자체도 같이 올라가므로, 몬스터의 공격을 웬만큼 받더라도 끄떡 없어지곤 한다. 하지만 그런 공격이 누적되다 보면 결국 캐릭터는 HP 게이지가 0이 되면서 나가떨어지게 된다. 그러니 중간중간 체력 회복 물약 같은 아이템을 적절히 사용해 주면서 게임을 진행해야 탈이 없다.


애석하게도 현실 세계에는 그런 힐링 포션 같은 마법 아이템은 없었다. 대신에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수면’을 최대한 활용하기로 했다.


어찌 보면 허접해 보이는 전략이지만, 여행을 준비하면서 블로그를 찾다가 우연히 나와 비슷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엄마랑 타이베이를 여행하던 사람이었는데, 본인은 일정 중에 숙소로 돌아와 30분 정도 낮잠을 자는 게 여행의 소소한 낙이라고 했다.


여행까지 가서 낮잠을 자나 싶은 생각도 들었는데, 돌이켜보면 일상 속에서는 낮잠이야말로 사치였다. 예컨대 평일에 회사 사무실에서 잠을 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쉬는 날이 아닌 때에 마음대로 낮잠을 잘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만큼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소수의 몇몇 사람들 뿐이었다.


어린이집에서는 낮잠 시간도 따로 있고, 스페인에서는 ‘시에스타’라고 해서 낮잠을 자는 문화까지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낮에 눈 좀 붙이는 일이 어느 새 사치품처럼 되었나 싶은 생각도 든다.



(표지 사진 : UnsplashKate Stone Mathe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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