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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의동 에밀리 Apr 18. 2024

산후우울증 탈출하기

0개월 20일

마트를 갔다.


생후 20일밖에 되지 않은 루나(태명)는 산후도우미 선생님께서 목욕을 시켜주시고 얼마 후 잠들었다. 속싸개로 꽁꽁 싸매서 조금 얼러주셨더니 입을 벌리고 잤다. 저녁과 밤의 육아를 도와주실 친정 엄마도 도착했다.


나는 아직도 오로가 나오고 있었다. 아이가 잠든 사이에, 생리대를 사러 집 근처 마트를 다녀오기로 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현관문에 ‘아이가 자고 있어요’ 자석이 붙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어디서 받은 사은품이었다. 남편이 이제 아이가 태어났으니 붙이면 되겠다고 즐겁게 이야기했었다. 맞은편 이웃집에서도 이따금 마주치면 “아기 태어났어요?”하고 물어보셨는데, 이제 이 자석을 보면 아시겠구나 싶었다.


바로 집 근처 마트를 가는 길인데도 어색했다. 출산하고 2주 이상을 한데서 자다가 돌아온 집이었다. 병원에서 2박3일, 산후조리원에서 2주를 지냈다.




돌이켜보면 산후조리원은 나에게 우울감과 불안을 잔뜩 안겨준 호화로운 감옥이었다. 집에서 조리하는 사람들은 경산모들이나 가능하고 외국은 산후조리원이 ‘없으니까’ 출산 후에 바로 집으로 온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겪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낯선 곳에서, 내 뱃속에 열 달 동안 품고 있던 아기를 다른 사람들(물론 전문가들이지만)에게 떠맡긴 채 2주를 보내니, 개인적으로는 성격상 걱정만을 내내 달고 살게 되었다. 고아도 아닌데 고아원처럼 플라스틱 통에 담겨져 단체생활을 하도록 만들어버렸다는, 곤히 자고 있는 새벽 6시 반에도 순서에 따라 기계적으로 목욕을 당하게(…) 했다는 생각 등등 미안한 감정이 매일매일 생기는 2주였다.


하지만 지나가버린 시간은 어쩔 수 없었다. 후회해봤자 그 후회하는 시간만큼 내 손해일 뿐이었다. 이제부터는 현재에 충실하게 사는 수밖에. 신생아의 부모로서 필요한 일들을 공부하고 익혀야지. 어쩌면 부모가 되는 순간부터 사람은 보다 더 성숙하게 인생에 임할 기회를 갖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세상 일을 아날로그와 디지털로 구분할 수 있다면, 육아는 아날로그적인 일에 가까웠다.


아이가 보내는 신호들은, 끊이지 않고 연속적인 시그널이 이어지는 아날로그 신호를 닮아 있었다. 1분 정도 얼러주면 달래지는 약한 울음, 자지러질 듯이 얼굴이 빨개지도록 울어대는 강한 울음, 얼굴에 피었다가 사그러졌다가 하는 여드름, 변의 색깔과 묽기, 수유에 걸리는 시간과 그 사이의 텀 등등.


객관식 문제를 풀어내는 학교 시험과는 완전 딴판이었고, 정답이 없다는 회사 업무와도 성격이 전혀 달랐다. 회사 업무에는 기한이 있고, 담당자가 있고, 결과와 고과가 있고, 공통적인 체크리스트와 매뉴얼을 만들 수 있다. 반면 아이를 돌보는 일은 평생 끝나지 않고, 아이의 기질마다 적절한 양육 방법이 다르고, 어제는 통했던 방식이 오늘은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마치 전세계 도서관과 아직 출판되지 않은 도서까지를 포함한 모든 책을 시험 범위로 하는, 끝이 없고 매일 치러야 하는 서술형 오픈북 테스트 같았다.




루나를 데리고 집에 온 게 지난주 목요일이었으니, 월요일인 오늘은 그로부터 5일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인지, 나는 그새 몸도 마음도 녹초가 되었다. 모유가 의학적으로 좋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수유를 시도하고 있지만 분유에 비해 먹이는 시간도 10배가 들고 아이와 매번 씨름을 반복하다 보니 완전히 지치고 있었다.


게다가 온통 모르는 것과 신경이 곤두서는 일들이 가득했다. 아이는 왜 옷과 기저귀를 갈아줄 때마다 그토록 울어제끼는지, 한밤중에 트림을 시키고 10분 이상 안아주었는데도 침대에만 눕히면 100% 확률로 쪼로록 게워내는 이유는 무엇인지, 밤새 끙끙대는 소리는 진짜로 내버려둬도 되는지 아니면 평소와는 달리 호다닥 달려가 상태를 살펴주어야 하는 상황인지…….


그러다 5일만에 외출을 했다. 외출이라고 해봤자 마트를 들르고 즉흥적으로 빽다방에서 코코아 한 잔을 사올 뿐이었는데도 그렇게 낯설 수가 없었다. 바깥은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되는 세상인가? 그러고보니 병원도 조리원도 마스크를 내내 끼고 다녀야 했다. 날씨는 어떨까? 루나를 낳은 2월에는 함박눈이 내렸는데, 이제는 롱패딩을 입지 않아도 되겠지?




마트에는 평소처럼 신선한 식재료와 생필품들이 가득했다. 딸기, 사과, 양송이 버섯, 진열대에 가지런하게 놓인 소세지와 맛살. 그 사이에서 장을 보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자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곳에는 예고도 없이 폭탄 같은 비명을 지르는 사람이 없었다. 아이는 정말 예쁘지만, 어째서 ‘전시 상황의 군인’과 ‘신생아를 키우는 부모’가 수면부족과 스트레스의 사례로 동시에 거론되는지 짐작이 갔다.


마트에서 생리대 두 봉지를 사고, 커피 한 잔을 사러 건물 밖을 나섰다. 따뜻한 라떼 한 잔을 사야지. 집에 가면 한 입 마시고 쓰러져 자느라 아깝게 남길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러고 싶었다.


그런데 키오스크 앞에 서고 나서야 나는 ‘수유부’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커피 한 잔 정도는 괜찮다고 하지만, 카페인이 모유로 흘러들어가서 아이가 잠을 못 이룰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임신 기간이 끝났지만 모유 수유를 하려면 여전히 먹을 것에 신경을 써야 하는구나.


대신에 초코 라떼 한 잔을 주문하고 매장 안에 앉아 음료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스피커에서는 봄을 연상시키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남녀 듀엣에 기타 소리가 감미로웠다. 빽다방의 트레이드 마크 격인 노란 알전구들도 화사했다. 창 밖으로는 겨울과 봄 사이에 걸친 계절에 걸맞는 이런저런 옷차림의 사람들이 저녁 노을빛에 물들어가는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내가 집에만 갇혀 있어서 그렇지, 세상은 훨씬 다양하고 넓은 일들로 가득하구나. 모유수유와 육아만으로 국한되지 않는구나……. 당연한 사실인데, 외출하러 나오기 전까지는 그게 희한하게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너무 좁게 보고 조급해하지 말아야지. 초코 라떼를 들고 집에 들어가는 발걸음은 훨씬 가벼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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