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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의동 에밀리 Apr 24. 2024

대충 살고 싶은 신생아 엄마

0개월 26일

육아에는 RPG 게임이랑 비슷한 구석이 많다. 


RPG 게임은 처음부터 모든 컨텐츠가 개방되지는 않는다. 아이템도 그렇고, 맨 처음 시작할 때는 정말 기본적인 것들만 플레이할 수 있다. 초보자용 무기를 가지고 초보자용 사냥감을 쫓는다. 그러다 레벨이 오르고 경험치가 쌓이면 슬슬 다른 플레이어들과 상호작용도 하고, 스토리도 개방되고, 새로운 맵도 열린다. 


루나가 태어나고 나서, 처음 신생아기 2주간은 먹고-자고의 반복이 대부분이었다. 울어도 ‘배고파’ 혹은 ‘기저귀가 축축해’가 대부분이었다. 3주차 이후부터는 ‘심심해’, ‘나를 들고 돌아다녀줘’, ‘외로우니까 안아줘’, ‘배는 안 고픈데 뭔가 빨고 싶어’, ‘그냥 뭔가 불편해’, ‘여기 좀 더운 것 같아’ 등등 요구사항이 많아졌다. 


하지만 모든 요구사항의 신호는 “으앙!”이기 때문에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다. 예전에 회사 동료분에게 “아기들의 패턴을 AI에게 학습시켜서 요구사항을 알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요?”하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동료분은 “아기들은 모두 제각각이라 학습이 불가능할 것이고, 개인별로 학습시키더라도 학습이 끝날 때쯤 신생아기도 끝날 것이고, 무엇보다도 ‘얘가 어디가 불편할까?’를 궁리하면서 부모가 되어가는 것”이라는 답을 주셨다. 


신생아기가 끝나면 기고, 걷고, 말하고, 뛰고, 공부하고, 사람을 사귀는 등 더 다양한 컨텐츠가 열리겠지? 그 때 나는 아이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민감하게 알아챌 수 있을까? 지금 먹고-자고-놀고 하는 것부터 차근차근 경험치를 쌓다 보면 잘 되려나.




아직은 아이가 울어도 무엇 때문에 우는지 알지 못해서 답답하다. 


단순히 ‘배고파요!’라면 밥을 먹이고, ‘잠이 안 와요!’라면 냅두면 그만일 텐데, 혹시라도 ‘아파요!’인데 그걸 내가 못 알아챌까봐 걱정이 된다. 


‘내버려두면 잘 거야, 엄마아빠도 삶이 있어야지~’라고 마음 편하게 생각했다가 적절한 치료를 못 해주면 어쩌나. 심각한 병이 아니라 기저귀 땀띠일지라도 부모가 초기에 잘 잡아줘야 하는데. 


지금까지는 대체로 ‘배고파요’라고 생각해서 밥을 더 주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다. 모유를 먹이다가 퉤 뱉고서 자기가 성질을 내는 이유는 뭘까. 분유를 허겁지겁 먹다가 중간 트림을 시키고 나서는 입을 꾹 다물더니 1시간 후에 뿌엥 하고 우는 이유는 또 뭘까. 그럴 때면 ‘아까 정말 배고파서 울었던 게 맞을까?’하고 아리송해진다. 


역시 어딘가 아픈 건데 내가 못 알아채고 있는 걸까?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는 늘 노심초사했다. 


임신 기간에는 조산기가 있었고, 출산할 때는 아이가 처음에 숨을 안 쉬었고, 신생아기에는 심잡음이 있으니 대학병원에 초음파를 보러 가라는 소견을 받았다. 결국 조산기는 무사히 넘기고, 숨은 금세 잘 쉬었고, 심잡음은 사라졌다. 하지만 하늘이 자꾸만 나에게서 아이를 빼앗아가려는 것만 같아서 불안했다. 


다행히 아이는 하루하루 건강하게 잘 지내주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한 일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근심걱정은 달고 있다. 울면 ‘아픈가?’ 싶고, 바로 안아줬다가 스스로 달랠 기회를 놓치게 한다거나, 혹은 바로 안아주지 않으면 애착형성에 문제가 되려나 싶은 딜레마에 빠진다. 모유와 분유 사이에서 고민하고, 분유도 몇 ml를 타줘야 배앓이와 배고픔 사이를 적절히 충족시킬지 고민한다. 누가 아이를 봐주지 않으면 샤워도 하러 가지를 못하겠다. 




그러다가 오늘은 문득 ‘대충 살고 싶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옛날에는 기본적으로 한 집에 아이가 여러 명이었는데다 엄마도 밭 메고 대가족 음식 하느라 애들 하나하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래도 다들 큰 문제 없이 어른이 되었다. 


가구도 기저귀 갈이대랑 아기 침대만 딱 두고, 바운서랑 역류방지쿠션 등을 싹 거둬낸대도 살 수 있지 않을까? 게워내면 뭐 어쩔 수 없지. 다른 데에 앉히고 눕혀 둔다고 해서 안 게우고 바로 잠드는 것도 아닌데. 목욕도 옛날 같으면 빨간색 고무 다라이 하나 가지고 시켰겠지만, 화학성분이 나쁘다니 그건 지양하고, 그냥 깨끗한 플라스틱 대야 하나 가지고 해도 솔직히 무슨 일이 있으랴. 


어차피 이 아이랑 나는 앞으로 20년 가까이, 혹은 그 이상의 세월을 같이 살 텐데. 너무 금이야 옥이야 하면서 나를 갈아넣어가며 키우다가는 서로 불행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적절한 선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다. 그런데 아까는 정말 왜 울었을까. 밥은 ‘울기 전에 배고파할 때’ 먹이라는데, ‘울면서 깨는’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하나. 



 * 사진 출처: Unsplash의 Kelly Sikke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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