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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의동 에밀리 May 03. 2024

육아 업무로 발령받았습니다만

1개월 7일

'이건 일이다'라고 생각하고 육아에 접근하면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계획 하에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았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육아는 곁눈질로만 보며 슬슬 피해왔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고리타분한 아저씨들이 여자를 비하할 때 주로 쓰는 멘트 중 하나가 "집에서 애나 봐라"였다. 나는 그 말이 너무 싫었다. 어쩌면 그 말을 너무도 혐오한 나머지, 육아를 하는 순간 나는 '집에서 애나 보는 여자'로 전락하고 말 것 같은 두려움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삶에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무언가로 전락하는 일'을 피하고 싶어할 테니까.


하지만 그런 회피적인 태도는 결국 내 발목을 잡았다. 출산하고 나서야 산전교육을 철저히 받았어야 했다고 땅을 치고 후회했다. 모유수유부터 시작해서 산후 조리 방법까지, 육아와 관련된 많은 일들이 출산 전에 알아보고 준비해둬야 수월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골든 타임에 시행해야 하는 하임리히법을, 기도 폐쇄된 사람을 발견하고 나서야 배워 익히려고 하면 이미 늦은 것이다.


자신감이 부족했기에, '나는 잘 못 해', '나는 서툴어서 전문가가 필요해', '혼자서는 할 수 없어' 등 약한 생각이 많이 들었다. "누구든 부모는 처음이니 서툰 것이 당연하고, 그에 비해 산모님은 정말 잘하고 계세요"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그건 단순히 위로하는 말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정말이었다.




서툴다고 해서 피할수록 자신감만 떨어질 뿐이었다. 오히려 '나 정도면 완전 짱이고, 앞으로도 내가 가는 길이 맞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적극적으로 육아에 임하면 정말로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육아는 되도록이면 전문가에게 돈 주고 맡겨야 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아이의 주양육자로서 마도(?)를 잡고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그럴수록 마음이 편안해졌고 무엇을 해야 할 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우는 아이에게 끌려다니면서 하루 일과를 흘려보내서는 지치기만 할 뿐이었다.


놀이공원에서 롤러코스터를 탈 때 써먹던 방법을 육아에도 적용하기로 했다. 나는 롤러코스터를 탈 때, 상하좌우로 몰아치는 롤러코스터에 내가 실려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 롤러코스터를 내가 조종하고 있다는 상상을 한다. 그러면 흥미로운 우주선의 조종석에 앉은 기분이 들면서 하나도 무섭지가 않았다. 위로 향할 때는 고개를 들고 '올라가자!'라고, 아래로 활강할 때는 '쌩하니 내려가자!' 하고 먼저 생각했다. 그런 생각은 롤러코스터를 되려 내 성에 차지 않는 탈것처럼 느껴지게끔 했다.


'어떻게 아이도 보고 집안일도 하지?'라고 생각할 시간에, '이건 해야 하는 일이야'라고 마음 먹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에는 왼팔로 아이를 번쩍 안아 들고서, 오른팔로는 세탁기와 로봇청소기도 돌리면서 집안도 정리했다. 그렇게 돌아다녔더니 아이에게 한참 동안 집안을 여행시켜준 셈이 되어서, 아이도 잔뜩 만족해서는 아기침대에 누워서도 딱히 울지 않았다. 그래서 그 사이에 빨래도 개고 식탁에 앉아서 이것저것 밀린 일도 했다.


그런 면에서는 회사 일이랑 비슷했다. '이걸 어떻게 해', '이건 정말 부당해'라고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었다. 그렇게 한탄하고 있을 때면 반드시 옆에는 묵묵히 척척 일을 해내고 있는 동료가 한 명 쯤은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 그제서야 '아? 저게 되는구나……' 하고 마음을 고쳐 먹고서 나도 군말 없이 일을 해냈고, 그러면 또 하게 됐다.




알고 보니 육아는 단순 노동이라기 보다는 고도의 전략이 필요한 분야였다.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육아는 공부할 게 많았다. 건강 관련된 내용은 물론이고, 수면과 영양, 습관, 심리, 발달 등 분야도 다양했다. 물론 그냥 하려면 또 막무가내로 하게 되겠지만, 그러면 육아는 마구잡이가 되고 스스로는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유튜브 채널도 보고, 책도 열심히 읽었다. 아기 침대에는 스탑워치를 놓고, 아이가 자다가 깼을 때 30초씩 시도할 수 있는 단계별 방법을 포스트잇에 적어서 붙여 두었다. 냉장고에는 아이가 울 때 시도할 수 있는 대처 매뉴얼을 A4 용지에 써서 자석으로 붙였다. 그러자 아이가 자다 깨거나 울 때, 당황해서 '어쩌지?' 하고 우왕좌왕하지 않고, 일단은 되든 안 되든 적어둔 대로 차근차근 실행했다.


물론 그렇게 준비한 방법이 항상 통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신기할 정도로 효과가 좋았다. 그리고 더 이상 주먹구구가 아니게 되자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배운 것에서 효과를 봤더니, 책을 읽거나 인터넷을 검색하면서 정보를 탐색하는 일이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모르는 것은 알아보면 되고, 긴가민가한 것은 직접 해보면 된다는 마인드가 되었다.




당당해지고 어쩌면 뻔뻔해지기도 해야 하는 게 육아가 아닐까 싶다.


많은 육아 관련 정보에서 공통적으로 이야기하길, 스스로가 아이의 주양육자이며 본인이 리드하는 대로 아이를 끌고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서 수면교육을 시킬 때도 아이가 운다고 해서 이랬다 저랬다 하면 안 된다고 한다. '너는 지금 잘 시간이고, 나는 널 재울거야'라는 마인드로 밀고 나가야 한다고 했다.


그 예시를 읽었는데 때마침 아이가 울었다. 자야 하는 저녁시간이었다. 아기 침대로 가서 아이를 내려다봤더니 공갈젖꼭지를 물고 있었다. 하지만 이게 공갈젖꼭지를 빨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우는 것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아이는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일단은 공갈젖꼭지를 뽑아냈다 (빠는 힘이 강한 아이라서 처음에는 엄두를 못 냈었다). 그리고 "루나야, 자야지." 하고 단호하게 말한 다음에 다시 공갈젖꼭지를 물려줬더니, 신기하게도 그 즉시 아이는 진정하고 눈을 스르르 감기 시작했다.


설마하니 신생아가 말을 알아들었을 리는 없고 (알아들었나? 미래에서 온 회귀자, 아니면 힘을 숨긴 천재?), 액션이 분명했으니 반응도 명확하게 나온 게 아닐까 싶다.


육아에 있어서는, 좀 서툴다고 아이에게 미안해 할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었다. 회사 일이나 육아나 마찬가지였다. 회사에서도 내가 담당하는 고객들에게 미안해하기만 한다면, 될 일도 안 되기 마련이었다. 오히려 '나를 담당자로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야겠다' 하는 마음 절반, '적어도 남들이랑 비교하면 이 정도면 업무처리를 엄청 잘 하는 편 아닌가?' 하는 마음 절반으로 임해야 했다. 또 그러다 보면 어느새 정말로 그렇게 되어 있었다.




예전에는 육아를 하면 무척 우울해지리라고 생각했다. 커리어도 끊기고, '애나 보는 사람'이라는 저주에 스스로 걸어들어가는 꼴이 될 것만 같았다.


심지어 20대의 어느 날에는 악몽도 꿨다. 작은 방에 아기와 함께 있었는데, 회사 동기들이 외국으로 간다며 같이 가겠냐고 물어오는데 나는 "미안, 아기를 봐야 해서"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덩그러니 아기와 단둘이만 남아 있었다. 이 얘기를 했더니 누군가는 "넌 결혼도 안 했는데 어떻게 그런 꿈을 꿨냐"라고 의아해 했다.


하지만 막상 해보니 전혀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몸이 힘들고 정신적으로 부담이 될 뿐, 소위 말하는 현타가 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육아는 회사 일과는 달리, 사내정치 같은 골치 아픈 문제는 생각하지 않아도 되어서 깔끔했다. 게다가 무조건적으로 보람된 일이었다. 회사에서는 뭘 하든지 '이 일이 무슨 의미가 있지?', '성과가 잘 안 나오면 어떡하지?' 같은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는데,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그 자체로 뜻깊은 일이었다.


더 공부하고, 알아보고, 하루하루 더 나아져봐야지. 나는 지금 '육아'라는 업무의 주담당자라는 생각으로.



 * 표지사진 출처 : Unsplash의 Kyle Nie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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