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뭇거림과 신중함의 중간에서
공책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요구한다.
가능성을 약속해야 하고, 시작을 감당해야 한다.
괜찮다 싶은 디자인을 발견해도, 결국 내려놓게 된다.
공책을 산다는 건 단순한 소비가 아니다.
그 안에 무엇을 쓸지, 어떻게 채울지를 미리 떠올려야 하는 일이다. 계획 없이 사기엔 그 공백이 너무 하얗고, 너무 무겁기에 괜히 그 자리에서 머뭇거리게 된다.
그럼에도, 가끔은 기대하게 된다.
‘이 공책을 사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좀 더 잘 써 내려갈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공책이 내게 무엇을 줄 수 있는 건 아니다.
결국 그 안을 채워야 할 사람은 나니까.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어쩌면 삶의 많은 선택들도 이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언제나 ‘더 나은 시작’을 고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시작이란 늘 부담이고, 책임이고, 마음먹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작을 미루고, 익숙한 것을 반복하며 안정을 택한다.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는 핑계를 대면서.
나는 오늘도 잡화점 한편에서 몇 번이나 공책을 들었다 내려놓았다. 모양은 마음에 들었지만, 그 공백이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너는 뭘 쓸 수 있니?
너는 어떤 시간을 담을 수 있니?
잡화점에서 보내는 시간은 늘 즐겁지만,
손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조금은 아쉽다.
결국 나는 오늘도 빈손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돌아오는 이 발걸음,
비어 있는 손끝,
그걸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이 머뭇거림도,
하나의 시작이 되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