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직장인의 뿌리와 출발점
“이건 마스크 공정 이슈로 리드타임이 밀렸어요.”
“레이저 쇼트에 따른 대미지 확인 결과가 아직…”
“EUV 영역에서는 이 사양이 표준이 아니라서요.”
처음 반도체 장비 회사로 이직한 후 회의실에서 들었던 말들이다.
‘레이저’, ‘마스크’, ‘EUV’…
말은 분명 한국어인데 나는 번역기를 켜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앉아 있는 자리는 예전과 같은 인사팀이었지만, 사무실 안에서 오가는 언어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산업이 달라졌다는 건 곧 ‘일의 언어’가 바뀐다는 뜻이었다.
이차전지 회사에 다니던 시절, 우리는 이런 말을 자주 썼다.
“배터리 열 폭주”, “면압”, “난연 소재”…
그때의 언어는 좀 더 손에 잡히는 느낌이 있었다.
생산공정도 비교적 단순했고 내가 다루던 인사 실무도 일정한 리듬이 있었다.
하지만 반도체는 달랐다.
고도로 미세하고, 극도로 정교하며, 전공자들도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단어들.
그 안에서 ‘인사’라는 일은 여전히 사람을 다루는 일이지만, 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할 언어’가 달라진 것이었다.
내가 처음 이해하지 못했던 건 ‘역할’이었다.
한 명의 엔지니어가 제품을 설계하고, 실험하고, 보고하고, 협의하는 일련의 과정은 단순히 ‘설계자’ 혹은 ‘연구원’이라고 명명하기엔 너무 복합적이었다.
나는 자꾸만 기존 직무 기준으로 이들을 분류하려 했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어렵다’며 넘겨버렸다.
하지만 어느 날, 한 부설연구소 직원이 말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데이터도 설계 대상입니다.”
그 말이 내 사고를 뒤흔들었다.
'사람이 하는 일의 정의가, 산업의 언어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그걸 알게 된 순간부터 나는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회의록을 받아 적을 때 나는 이제 ‘단어’를 넘어 ‘맥락’을 보려 한다.
이 팀이 이 용어를 쓸 때, 무슨 고민을 안고 있는 건지.
이 직무가 이 공정을 설명할 때, 어떤 판단을 해야 하는 건지.
그 언어 안에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그 사람의 시간과 경험, 감정이 담겨 있다는 걸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인사담당자로서 산업이 바뀌는 경험은 그 자체가 재교육의 연속이다.
한 직무를 이해하려면, 그 직무가 속한 조직을 이해해야 하고, 조직을 이해하려면, 그 조직이 만든 기술을 알아야 한다.
기술을 알기 위해서는 그 기술이 태어난 배경을 들어야 하고 그 배경은 결국 ‘사람’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인사 업무는 결국, 어떤 산업에서도 사람을 중심으로 맥락을 파악하는 일이다.
가끔은 ‘사람 일’보다 기술 용어가 더 어렵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래서 나는 메모장을 꺼내 사내 용어를 정리해 본다.
“EUV(Extreme Ultra Violet) – 극자외선, 파장이 짧아 정밀한 노광 가능”
“Mask Defect – 포토마스크의 결함으로 인한 회로 이상”
이런 정의를 메모하면서 나는 문득 웃는다.
국문학을 전공했던 내가 지금은 기술 용어 사전을 만들고 있다니.
그러나 내가 진짜 쓰고 있는 건 기술 사전이 아니라 ‘일하는 사람들의 감정 기록’ 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어떤 말을 쓰는지, 어떤 순간에 그 말을 꺼내는지, 그 맥락을 읽는 일이 내 일이 되었다.
산업이 바뀌면, 사람도 바뀌고, 조직도 바뀌고, 그 안에서 ‘인사’라는 역할도 전과는 달라진다.
어쩌면 나는 지금 ‘인사’라는 말을 새롭게 정의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전에는 ‘인사’가 업무 처리를 의미했다면, 지금은 언어의 번역자, 그리고 사람과 기술 사이의 다리를 놓는 역할로 느껴진다.
내가 반도체 장비 회사를 선택한 이유가 기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기술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언어를 이해하고 싶었고, 그 언어 속에서, 그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일하고 있는지를 옆에서 지켜보고 싶었다.
산업은 어렵고, 기술은 복잡하지만, 그 안의 사람은 여전히 말로 살아간다.
그 말을 듣는 일이, 그리고 그 말을 기록하는 일이,
내가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