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직장인의 뿌리와 출발점
출근 첫날.
회사 로비에서 인사담당자에게 연락을 해 안내를 받으며 신규 입사자 교육을 시작한 나는 어색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손끝은 얼어 있었고,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으며, 심장은 소음처럼 뛰고 있었다.
처음 입사한 회사는 이차전지 부품을 제조하는 곳이었고 나는 경영관리팀 소속 인사 파트로 첫 발을 내디뎠다.
그런데도 '인사팀'이라는 이름이 이렇게 낯설 수가 없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사람을 좋아하는 국문과생’ 일뿐이었다.
첫 출근 날, 가장 많이 했던 말은 단연 “네!”였다.
“이쪽으로 오세요.”
“네!”
“사내 그룹웨어는 이걸 써요.”
“아 네!”
“담당하실 일은 우선 맡아야 할 자료부터 읽어보세요.”
“네…네!!”
긴장한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어느 순간부터는 반사적으로 나오는 자동 응답 같았다.
속마음은 늘 다르게 말하고 있었는데,
“이거는 왜 이 순서로 하나요?”라고 묻고 싶어도
“아, 네…” 하고 넘기는 게 익숙했다.
그 말 한마디 뒤에는 조심스러움이, 그리고 약간의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모두가 바빠 보였고 나만 이 조직의 리듬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룹웨어 시스템과 ERP 프로그램, 각종 경비 및 회계 규정과 고용노동부 양식들.
나는 세상의 모든 단어가 이렇게 낯설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책상 앞에서 마우스를 쥐고 있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구직자였다.
점심시간, 회의실로 불려 갔고 내 옆자리 선임은 업무 인수인계를 시작했다.
“일단 직원 입사부터 처리해 보죠.”
“아… 네…”
“이거는 사번 부여하고, 인사기록카드 정보를 전산에 등록해야 하고…”
“넵…”
“혹시 여기까지 질문 있어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아뇨,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질문이 없었던 게 아니라 질문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건 어떤 흐름으로 하나요?’, ‘이 수치는 어디서 가져와야 하죠?’
그 모든 물음은 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내 안에서만 맴돌았다.
그래도 하루가 끝나고 퇴근 지문을 찍은 뒤에 차를 타며 나 자신에게 속삭였다.
“그래도 오늘은 버텼다.”
첫날은 그렇게 ‘버틴 하루’로 지나갔다.
그 후로도 며칠간은 ‘네!’가 내 모든 대답이었다.
실수를 해도 “네…”
지시를 받아도 “네!”
회의에서 돌아가는 말을 다 알아듣지 못해도 “네에에…”
그러다 한 선배가 웃으며 말했다.
“진짜 대답 잘한다. 근데 가끔은 ‘왜요?’도 좀 해봐요. 무조건 수긍은 안 돼요.”
그 말이 내 마음을 콕 찔렀다.
나는 ‘착한 신입’이 되고 싶었고, ‘일 잘하는 신입’으로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다.
왜 이 일이 존재하는지, 어떤 흐름 속에서 움직이는지, 그 중심에 어떤 사람이 있는지 그것을 묻지 못하는 인사담당자는 결국 ‘일하는 기계’가 되고 만다.
하루는 퇴사자 면담에 동석하게 되었는데 선임이 내게 작은 메모를 건넸다.
“오늘은 듣기만 하세요. 말하지 않아도 돼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또 “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면담 중간, 퇴사자가 울먹이며 말했다.
“제가 여기서 뭘 잘못했는지, 한 번도 누가 이야기해 준 적이 없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말 한마디가 이렇게 무거울 수 있구나.
그리고 ‘인사’라는 일은 그 말의 무게를 가장 가까이서 마주하는 일이구나.
그제야 알았다.
“네”만 반복하는 인사담당자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그날 퇴근하고 나는 작은 다짐을 했다.
‘내일은 "왜요?"를 한 번만 말해보자.’
그건 나에게 작고 조용한 혁명이었다.
작은 질문 하나가 나의 입사 첫 달을 바꿔놓았다.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새로 입사한 신입들에게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한다.
“괜찮아요. 처음엔 ‘네’만 해도 돼요. 근데요, 질문은 쌓아두지 마세요. 나중에 꺼내기 어려워지거든요. 모르는 건 죄가 아닌데 모르는 척을 안 하는 건 때때로 불편함이 돼요.”
나는 아직도 ‘네’라는 말버릇을 완전히 고치진 못했다.
그건 내 성격이고, 내가 지닌 조심성이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습관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네’ 사이사이에 질문이 있어야 하고 그 질문이 있어야 일의 결이 생긴다는 걸.
인사라는 일은 결국 ‘왜’에서 출발해 ‘사람’으로 향하는 일이니까.
입사 첫날의 나는 서툴렀지만, 그날의 내가 있었기에 지금의 나는 사람을 조금 더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질문을 받더라도 나직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건요… 저도 처음엔 몰랐어요. 그런데요, 같이 해보면 알게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