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직장인의 뿌리와 출발점
“국어국문학과를 나왔습니다.”
내 자기소개는 늘 그 문장으로 시작되었다.
처음 이력서를 쓸 때도, 첫 면접에서 말문을 열 때도, 누군가가 내 전공을 물을 때도.
언뜻 단순한 정보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내 삶의 리듬과 방향, 그리고 약간의 후회와 애정이 모두 담겨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문장을 좋아했다. 책을 읽는 걸 좋아했고, 독서록보다 한 문장에 매달리는 스타일이었다. 정해진 줄거리를 해석하는 것보다, 단어의 결을 음미하는 걸 더 즐겼다.
그래서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하는 건 큰 고민이 아니었다.
오히려 ‘문장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채로 대학에 들어간 것 같았다.
대학교 1학년, 교수님이 처음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문학은 인간의 삶을 가장 가까이서 바라보는 창이다.”
그 말이 마음에 들어 필통에 적어두었고 그해 여름엔 고전 산문을 필사하면서 지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아름다운 문장이 다 내 것이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4학년이 되었을 때 상황은 달라졌다.
주변 친구들이 임용고시를 준비하거나 신문사, 출판사 취업을 목표로 발걸음을 옮길 때, 나는 어떤 길도 선택하지 못한 채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우리 학교의 국어국문학과는 교직이수를 할 수 없었기에 교사라는 선택지는 애초에 없었고 문학 비평 또는 수필 등을 쓰며 살아가는 삶이 과연 내 것일까 하는 회의도 들었다.
나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고전분과 석사과정 1년을 다녔다.
하지만 내가 좋아했던 문장의 세계는 학문의 언어와는 조금 달랐다.
분석과 해석, 이론과 인용으로 채워진 글들 속에서 나는 점점 자신을 잃어갔다.
한 해가 지나고, 결국 자퇴서를 냈다.
그때부터 내 문장은 방향을 바꿔야 했다.
“국문과를 나왔습니다.”라는 말 뒤에 붙는 설명이 달라졌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길을 찾고 있습니다.”
“현장 경험을 쌓고 싶어서 회사를 알아보고 있어요.”
그 문장은 자꾸만 해명처럼 들렸다.
나는 마치 변명을 하듯 전공을 설명했다.
첫 이력서를 썼던 날이 생각난다.
워드 문서의 흰 화면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언어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조직의 말과 결을 살필 수 있는 인사담당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 한 문장을 쓰기까지 몇 시간이 걸렸다.
처음엔 “문장을 사랑해 온 경험을 바탕으로…”로 시작했지만, ‘문장’이라는 단어가 왠지 조직에선 통하지 않을 것 같아 다시 지웠다.
결국 ‘역량’, ‘실무’, ‘성실함’ 같은 단어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지금 나는 반도체 장비 회사에서 인사담당자로 일한다.
문장을 사랑했던 사람은 이제 수많은 이력서를 읽는 사람이 되었다.
어떤 날은 하루에 오십 개가 넘는 자소서를 검토하고, 지원자들과 전화 인터뷰를 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는 그들의 첫 문장을 만난다.
“저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입니다.”
“어릴 적부터 사람과 소통하는 걸 좋아했습니다.”
“성실함과 끈기를 무기로 삼아왔습니다.”
조금은 평범하고 어디서 본 듯한 말들.
하지만 그 문장 하나하나가 낯설지 않다.
나도 그랬으니까.
어떻게든 나를 잘 보이고 싶고, 실수를 피하고 싶고, 진심을 보여주고 싶은데 어떤 말이 진심처럼 들릴지 몰라 전전긍긍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요즘은 문장의 결을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
지나치게 수식이 많은 문장은 오히려 불안한 마음의 방어막처럼 느껴지고, 문장이 짧아도 담백하게 쓰여 있으면 오히려 마음이 간다.
‘저는 일하는 걸 좋아합니다.’ 그렇게 쓰인 자소서를 본 적이 있다.
너무 짧아서 당황했지만, 나는 그를 1차 면접에 올렸다.
진심이 그 문장 안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도 기억에 남는 문장이 있다.
“무언가를 깊이 바라보고, 오래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누군가에겐 밋밋한 자기소개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 문장에서 오래 머물렀다.
그는 최종까지 올라갔고, 지금은 우리 회사의 구성원이다.
그의 문장이 결국 나를 움직였던 셈이다.
이제 나는 안다.
이력서의 첫 문장은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게 아니다.
그건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라고 세상에 내보이는 첫 마음이다.
때로는 조심스럽고, 때로는 조금 과장되기도 하지만, 그 문장 안에는 진심이 있다.
"그리고 그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나 같은 국문과 출신 인사담당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