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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회사, 다른 풍경

Chapter 1. 직장인의 뿌리와 출발점

by 문장담당자

"두 번째 회사, 다른 풍경 - 이직은 도망이 아닌 방향"


전기차 관련 소식이 유난히 많이 들리던 해였다.
도로 위엔 조용한 모터음이 넘실거릴 준비를 하고 있었고 사람들이 가장 많이 검색한 키워드 중 하나가 '콘셉트카 45'였다.

이는 현대자동차가 2019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공개한 콘셉트 카 명칭이었다.

결국 그 콘셉트의 디자인은 큰 변화 없이 2021년에 양산 모델인 현재의 아이오닉 5로 이어졌다.

당시 나는 한 이차전지 부품 회사에 갓 입사한 신입 인사담당자였다.
내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채용 공고를 내고, 입퇴사 처리를 하고, 급여 명세서를 정리하는 것이었지만,
그해 봄 회사의 선임이 말했다.
“이제 전기차 시대야. 우리 회사도 여기에서 기회를 봐야지.”

그때는 막연히, 내가 ‘떠오르는 산업’에 몸담고 있다는 뿌듯함이 있었다.


당시 재직 중이던 회사는 전기차 이차전지의 배터리셀 관련 부품이었다. 당시 선임이 기회라 표현한 이유는 배터리 열폭주 방지, 면압 조절 등의 역할을 하는 우리 회사의 부품이 고객사 평가를 거쳐 모비스향으로의 공급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어디 다녀요?”라고 물으면 “전기차 관련된 이차전지 부품 만드는 회사요.”라고 답했다.
자세한 설명이 없어도,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데 다니시네요."
그 말이 참 따뜻하게 느껴졌다.
나의 이름보다 회사명이 더 신뢰받던 그 시절, 나는 내가 ‘괜찮은 위치’에 서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몇 년 뒤, 세상이 다시 흔들렸다.
코로나로 인한 공급망 위기, 그리고 반도체 수급 불균형.
뉴스에서는 전기차 출고량 지연, 부품 부족, 차량용 반도체 문제를 매일같이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차를 사놓고도 받지 못했고, 우리 회사의 납품 스케줄도 계속 조정되었다.
이상했다.

왜 반도체가 부족하면 전기차가 멈추는 걸까.
‘반도체가 뭐길래?’라는 질문이 머리에 맴돌았다.

궁금증이 인사담당자의 호기심으로 변했다.
그때부터 반도체에 대해 자료를 찾아 읽기 시작했다.
EUV, DUV, 노광공정, 마스크…
모르는 단어 투성이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모든 전자의 흐름은 결국 ‘보이지 않는 작은 칩’에서 시작된다.

전기차를 움직이는 동력, 공장의 자동화, 스마트폰, 노트북, 카메라…

우리가 ‘지금’이라고 부르는 세계의 대부분이 반도체에 기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나는 점점 더 그 세계에 발을 담그고 싶어졌다.
이직을 결심한 건, 불안해서가 아니라 방향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두려웠다.
다니던 회사에서도 인사 평가를 통해 호봉 두 계단 상승의 발탁 승진을 하는 등 인정받고 있었고 업무도 점차 익숙해지고 있었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자리에 오래 있을수록 마음 한편이 공허했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이 일에 진심인지’도 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직은 도망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느낀 건 ‘더 알고 싶은 것’을 향한 걷기였다.


반도체 장비 회사로 이직했을 때 사람들은 말했다.
“요즘 잘 나가는 데로 갔네.”
“역시, 타이밍 좋다.”
나는 그 말에 그저 웃었지만, 사실 그것은 단순한 ‘좋은 타이밍’이 아니었다.
그건 나의 시선이 움직인 방향이었다.

새로운 회사에서는 또 다른 낯섦이 기다리고 있었다.
회사의 용어도, 기술의 흐름도, 사람들의 말투도 조금씩 달랐다.

하지만 나는 예전보다 덜 흔들렸다.

이제는 ‘모른다’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가 ‘배우기 위해서’라는 걸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은 내가 걸어온 길이 굴곡져 보이기도 한다.
문학을 전공하고, 고전을 공부하다가, 이차전지 회사를 거쳐, 지금은 반도체 장비회사의 인사팀에 앉아 있다.
하지만 이 길은 나에게 단 하나의 공통점을 준다.

“사람이 어떤 흐름을 좇아 살아가는지 그리고 무엇에 마음을 두고 있는지를 매일 바라보는 자리.”

그것이 인사담당자의 자리였다.
산업은 바뀌고, 업무는 달라졌지만, 내가 사람을 대하는 마음은 그대로였다.


요즘 나는 이직을 고민하는 사람들의 면담을 자주 한다.
그들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눈빛은 흔들린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게 도망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그래서 묻는다.

“어떤 방향으로 걷고 싶은가요?”

그 한 문장이 내 지난 선택을 담은 문장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그 질문이, 도망이 아닌 방향으로의 첫걸음이 될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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