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밴쿠버 워킹홀리데이 26일 차
기침의 원인이 무엇일까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 룸메이트 형도 나만큼은 아니지만 기침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득 카펫이 원인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어디서 먼지가 많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아서다. 나는 이게 정말 원인인가 싶어 어제 마스크를 끼고 잤다. 아침에 느껴지는 칼칼한 목이 조금 덜했다. 정말 청소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이거 어떻게 청소하지?"
우리는 바로 밴조선 장터와 유튜브를 찾아봤다. 그렇게 발견한 한 영상. 이걸 보고 너무 충격 먹어서 숨 쉬는 것조차도 찝찝했다. 장터에는 습식 청소기만 있어 크레이그리스트도 찾았다. 29$의 진공청소기를 발견하고 연락했다. 그의 이름 롤랜드였다. 오후 5시에 만나기로 약속한 뒤 전화가 끝났다. 그러자 형이 말했다.
"롤랜드...? 잠시만 내 폰 봐봐. 같은 번호 아냐?"
정말 번호가 같았다. 저번에 우리에게 밥솥 팔면서 정치얘기 했던 아저씨였다.
오후 1시 쯤 운동을 갔다가 바로 롤랜드를 만나러 갔다. 가는 길에 서브웨이에서 샌드위치를 사먹었다. 여긴 한국과 다르게 소스류에 올리브 오일과 레드와인 식초가 없었다. 또 몇 개 달랐던 것 같은데 평소에 저거 두개와 소금 후추 빼곤 하지 않아서 모르겠다. 아무튼 그래서 스위트 어니언과 스파이시... 뭐를 넣었다. 기가 막혔다.
이제와서 말하지만, 우리는 살게 많아서 보통 중고거래를 하게 되면 다른 물건들은 안파냐고 물어본다. 근데 롤랜드는 정치 얘기 듣는다고 정신이 다 빠져서 물어볼 수가 없었다. 하하... 그냥 물어봤으면 이렇게 헛발걸음 안하는건데. 우리는 레이크 시티 웨이를 나오며 투덜거렸다.
롤랜드는 역시나 지하 차고 문으로 우리를 맞았다. 내 기침을 소탕할 청소기를 받았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접시와 컵, 귤이 담긴 비닐봉투를 내밀었다.
"와이프가 주래. 저번에 사 간 사람이라니까 챙겨주더라. 안에 귤도 들어있으니 맛있게 먹어. 공짜야!"
"헉 정말 너무 고마워. 진심으로. (잠시 후) 혹시 다른 물건도 팔아?"
"어... 아 맞아 토스트기도 팔아야해."
"(어... 별로 필요 없는데) 얼만데?"
"5달러. 너 이런거 새로 사려면 100달러는 줘야할걸"
룸메이트 누나는 빵 구워먹는 것을 좋아했다. 5달러 밖에 안해서 형과 나는 싱글벙글 구매했다. 역시 중고거래도 운이 좋아야한다.
CV 쓸 시간도 부족하지만, 나는 외국인 친구들이 놀자고 하면 나가는 편이다. 일종의 영어수업이라 생각하고 나가는 것이다. 가끔은 내가 먼저 해야하는 경우도 생긴다. 어느 정도의 영어 스피킹을 넘어서면, 깊이있는 관계에서의 스피킹을 배워야하기 때문이다. 처음 만났을 때 대화법만 아는 사람이 토론을 할 수는 없으니까.
마침 어제 닐이 한 번 놀자고 했으므로 연락했다. 닐은 마침 친구와의 약속이 파투가 난 상태였다. 하지만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나에게 돈이 없다는 것.
"닐. 너희 집에서 요리해먹자!"
"그럼 그냥 밖에서 먹자"
"안돼. 나 백수라 돈 없어."
"사줄게. 걱정 하지마."
그때 쯤 천국은 난리가 났을 듯 했다. 천사 한 명이 여기 있으니 후후.
닐에게 터키 음식을 가르쳐 달랬는데, 터키음식점 없다며 이 곳을 데려갔다. 웨스트 헤이스팅스(West Hastings St.)에 위치한 나이팅게일(Nightingale)이었다. 나는 간호사를 떠올렸는데, 새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이었다.
내가 식당에서 야채요리 먹어볼 일이 있을까. 있었다. 바로 오늘. 닐은 콜리플라워 요리, 후라이드 치킨, 머쉬룸 피자를 주문했다. 개인적으로 저 세 요리 중에 콜리플라워가 가장 맛있었다. 마이야르가 된 표면에 신맛, 단맛, 짠맛, 쓴맛이 조화를 이뤘다. 살면서 먹어본 야채 중 제일 맛있었다. 특유의 구조가 주는 식감도 마찬가지. 치킨은 잘 튀겼지만 특별할 것까진 없는 맛이었다. 피자도 일맥상통하다.
아까 식당으로 가는 길에 닐이 술 먹을거냐고 물었다.
"당연하지~ 한국인은 밥은 안먹어도 술은 먹어."
"그러면 저녁 먹고 리쿼 스토어 가자."
나이팅게일에서 나오자 닐은 우버를 잡았다. 걸어갈 만큼 가깝지 않냐고 물으니 걷기가 싫다고 했다. 주류점에서 닐은 맥주를 고르고, 나는 위스키를 골랐다. '알버타 프리미엄'이라는 저렴한 캐나디안 위스키였다. 살짝 매운 끝 맛 말고는 특별할게 없었다. 에어링을 조금 더 시킨 후 먹어보고싶다.
닐이 엄청 추천한 탓에 이태원 클라스를 봤다. 군대에 있을 때 인기 엄청 많았었는데. 이거 마지막화 하는 날 당직사관이 특별히 연등까지 시켜줬으니. 막상 보니 꽤 재밌어서 1화부터 3화까지 쭉 봤다. 그러다 새벽 2시가 다 되어 우버를 탔다. 이 집에서 우리 집까지 34불 정도 나왔다. 미친 택시 가격. 다음엔 재워달라고 해야하나.
그래도 우버 드라이버가 꽤 친절했다. 타자마자 물도 주고 내릴 때 군것질 거리도 줬다. 대화도 나름 재밌었고. 이게 드라이버 평점이 높으면 우버 매칭이 잘된다던데 그래서 그런가. 동기가 어떻게 됐든 기분이 좋았다.
사실 오늘도 기침 때문에 컨디션이 좋지 않아 막 놀지는 못했다. 아까 청소기를 사와서 밀어보니 먼지가 기가 막히게 많이 나왔다. 영상처럼 충격적이게 말이다. 내일은 이 악물고 카펫을 박박 긇어봐야겠다. 그리고 점점 경제적 압박이 느껴진다. 얼른 CV를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