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메이트들의 헌신
캐나다 밴쿠버 워킹홀리데이 59일 차 - 61일 차
지난 금요일(11월 11일). 일본인 친구가 자기 집에 초대한 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목이 굉장히 아팠다. 카펫 청소를 못한 지 일주일. 그 동안 집에 오래 머물러 있었으니 가끔 찾아오는 먼지의 칼칼함인 줄 알았다.
그런데 느낌이 좀 이상했다. 기침할 때마다 내 기관지의 위치가 느껴졌다. 이런 적은 처음인데. 한 번 콜록일 때마다 감소하는 생명력이 감당되지 않아 한국에서 가져온 감기약을 먹었다. 아세트아미노펜(해열진통제)가 포함된 종합감기약이었다. 쉽사리 넘어갈 병마는 아니라고 느껴졌다. 친구에게 정말 미안하지만 컨디션이 안좋아서 놀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퇴근 전까지 말해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오후 5시까지 누워있었다.
"My schedule is changed today. I'll get off at 6." (나 오늘 스케쥴 바꼈어. 6시에 퇴근해)
"I guess I can see you. I will get there until then!" (나 너 볼 수 있을 것 같아. 나 그때까지 거기 갈께)
샤워하고 나오니 조금 괜찮았다. 여전히 컨디션은 최악이었지만, 이 약속을 깨고싶지는 않았다.
버스가 늦어져 친구의 직장이 아닌 집 주변 역으로 바로 갔다. 가면서 이 선택이 맞았던 것인지 얼마나 되돌아 보았는지. 저녁을 먹지 않았으므로 장을 봐야했다. 가까운 마트는 걸어서 15분. 그래... 이왕 만났는데 아프다고 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그래... 가자!
힘든 시간을 지나 친구 집에 도착하니 1시간 쯤 지나있었다. 정말 힘든 시간이었다.
입맛이 없어 뭐 고르고 싶은게 없었다. 라면이라면 어떻게 먹겠지 싶어 먹자고 했는데 거의 못먹었다. 롤도 마찬가지. 과일이 제일 맛있었던 것 같다. 그리곤 보드카를 홀짝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머리가 아팠다. 열이었다. 그렇다고 열이 난다고 할 수는 없었다. 최대한 버티다가 "정말 미안한데 컨디션이 점점 안좋아져서 집에 가야할 것 같아." 하곤 도망쳐 나왔다. 절대 금방 나을 수 없는 병기운이었기 때문. 나오기 전에 혹시 해서 챙겨나온 종합감기약을 두 알 챙겨먹었다.
술 먹고 아세트아미노펜 먹으면 어떡하냐고? 그거 따질 몸 상태가 아니었다.
그러면 술을 먹으면 안되지 않았냐고?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안먹었다...는 아니고 미련했다.
가까운 거리임에도 우버를 탔다. 집에 와 죽을 듯한 표정으로 소파에 누웠다. 누나가 걱정된 표정으로 내 상태를 묻더니 이마에 손을 얹었다. 체온계가 없어서 못쟀을 뿐, 39도까진 올라갔을거다. 춥다고 덜덜 떨면서 이불을 덮고 있었으니. 누나는 수건 두 개를 물에 적셔와서 하나를 내 이마에 올리고, 남은 하나로 내 팔과 다리를 닦아줬다. 추우면서 따뜻했다. 기억나지 않는 어릴 적, 엄마에게서 느낀 온기.
아세트아미노펜과 누나의 손길에 이윽고 열이 내렸다. 캐나다에 있는 내내 누나를 받들어 모시겠노라 다짐했다.
다음 날은 약을 바꿨다. 기관지 염증이 너무 심하니 덱시부프로펜(해열소염진통제)를 먹었다. 자고 일어나고, 자고 일어났다. 마트에 가는 형에게 테라플루를 사달라고 했다. 한국에서 이것만큼 애용했던게 없었다. 형은 드럭스토어에서 같은 성분과 형태의 약을 사다주었다. 먹고 다시 잤다.
저녁 11시였을까, 두통이 너무 심해 깼다. 열이 다시 심하게 올랐다. 전 날처럼. 이번엔 형이 젖은 수건을 가져다주었다. 아이스팩까지 동원해서 몸을 식혔다. 군대에서 폐렴걸렸을 때 빼곤 이렇게 열이 심했던 적이 없었는데. 근육통에 잇몸까지 아프니 점점 걱정이 시작됐다.
'폐렴이면 어떡하지? 항생제가...'
'입원은 어떡하지? 병원비가...'
'보험 어떻게 적용하지? 이걸로 되나...'
'차라리 코로나였음 좋겠다...'
이번엔 형의 노력과 덱시부프로펜, 아세트아미노펜 덕분에 열이 내렸다. 바로 키트를 써봤고, 음성이 나왔다. 코로나가 아니여서 개탄스러운 상황. 심지어 열이 내려도 알 수 없는 두통과 잇몸통이 나를 엄습했다. 어쨌거나 그리 힘든 수준은 아니여서 잠에 들 수 있었다. 나는 캐나다에 있는 내내 형을 받들어 모시겠노라 다짐했다.
다음 날, 눈을 떴다. 눈을 뜰 수 있음에 (살아있음에) 감사했다. 열이 심하지 않았다. 아침을 먹고, 약을 먹었다. 어제와 같이 열이 내려도 두통과 잇몸통이 매우 심하게 느껴졌다. 문득, 신(Sour) 음식이 매우매우 먹고 싶었다. 잠시만... 설마? 코스트코에 간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올 때 과일 좀 사와줘. 오렌지 같은거
시체처럼 누워있으니 얼마 후 방울토마토가 도착했다. 족쇄에 묶인 듯한 몸으로 후다닥 씻어 하나를 입에 넣었다. 갑자기 턱이 빡! 당기면서 잇몸 통증이 점점 사라졌다. 계속 먹었다. 몸에 피가 도는 듯하면서 소름이 돋았다. 두통이 사라졌다. 아... 정말 비타민C 결핍이었나보다. 어느 새 족쇄는 사라지고 내 발에는 헤르메스의 날개달린 신발만 남아있었다. 물론 감기기운이 다 떨어진 것은 아니지만, 80퍼센트는 회복했달까.
순식간에 나아버린 덕분에 점심에 초대된 손님분들도 즐겁게 맞이할 수 있었다.
쓰려 했던 글들이 많았음에도, 형과 누나의 도움을 최대한 잊지 않으려 제일 먼저 쓴다. 살면서 인복이 좋다고 스스로 느껴본 순간이 거의 없는데, 정말 제대로 느끼게 된 순간이었다. 먼 훗날, 이 글이 사라진다해도 잊지 않을게요. 고맙습니다.
* 살아서 글을 쓸 수 있게 해준 '현승'누나, '준호'형 그리고 글 쓰라고 말해준 '예솔'에게 고마워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