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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소하극장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수연, "라이프", JTBC

by 소하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 현실과 드라마

드라마는 현실적이지 않다. 시청자가 드라마로부터 현실성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현실을 닮아있는 드라마는 늘 호평을 받는다. 화제가 되지 않는 것도, 시청률이 마냥 낮은 것도 아니다. 왜 시청자들은 현실성을 원하지 않지만, 드라마가 현실과 닮아있기를 바라는 것일까? 아마도 그건, 현실과 진실이 같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은 진실의 적이다
-돈키호테-

현실은 아무런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한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필요한 만큼의 우연이고, ‘운’은 막강한 힘을 가진 집행자로서 우리 삶에 개입한다. 우리는 현실 안에서 살아갈 뿐, 현실 자체를 조작할 수 없다. 다만 “라이프”는 현실을 정교하게 빌려와 어떻게 현실이 보여져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 발화를 ‘진실’이라 부르고 싶다. 진실은 이야기의 발화 방식이다. 진실과 현실은 늘 대결한다. 현실은 ‘어쩔 수 없어’라고 말하고, 진실은 ‘이렇게 해보자’고 말한다.



2. 권력과 병원

“라이프”는 의학드라마임과 동시에 권력을 다루는 드라마이다. 2007년 MBC에서 방영되었던 의학/권력 드라마 “하얀 거탑”과 “라이프”의 분명한 차이점은 권력의 충돌 지점이다. "하얀 거탑"은 의사들 내부에서 병원이라는 권력기관을 두고 누가 더 우위를 차지하느냐를 두고 싸웠지만, 라이프에서는 병원 자체를 침탈하려는 자본주의 권력과 싸운다. 이 싸움에서는 선악이 없다. 일방적 폭력으로 점철되기보단 각자의 이해관계가 부딪치며 이야기의 폭발력이 살아난다. 이수연 작가가 보여주는 균형감각은 드라마를 더욱 현실감 있게 만든다.

“라이프”는 굉장히 고증이 잘 된 드라마이기도 하다. 드라마를 끌고 가는 중심 서사에 현실 병원의 실상을 핍진하게 끼워 넣는다. 적자 3과(응급의학과, 산부인과, 소아과)가 파견을 구실로 퇴출당한다거나, 부정하게 땅을 매입해 건물을 올린다거나, 병원을 민영화한다거나, 현실에서 있음 직한 일들 수준이 아니라 진짜 있었던 일들이 드라마 내에 등장한다.

재단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병원은 의사들에게 무법지대나 다름없다. 기득권 의사들은 자기 밥그릇을 챙기거나 과오를 감추기에 급급하고 비의료인 사장은 어떻게든 병원을 돈벌이로만 이용하려 한다. 환자들은 밀려들고 비인기과 의료진들은 인력난에 허덕인다. “라이프” 속 병원의 현실은 처참하다. 시청자들이 기대하는 것은 절망 속에서 피어나는 진실, 그 진실을 쟁취해내는 영웅이다.



3. 고발과 설득

예진우는 영웅적 인물이다. 신념과 파멸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있다. 다만 현실 속 예진우 정도의 전공의는 아무런 결정권이 없다. ‘비밀의 숲’ 황시목 검사가 가지고 있던 권력에 비하면 아주 초라한 수준이다. 따라서 예진우가 선택하는 저항의 방식은 ‘고발’이다. 그리고 여기에 ‘설득’이라는 축이 동시에 있다. "비밀의 숲"이 추리하고 진실을 밝혀내는 식의 문제 해결 방식을 택했다면, "라이프"는 고발(예진우)하고 설득(이노을)하는 문제 해결 방식을 택했다. “라이프”에서 러브라인이 주된 분량을 차지했던 것은 우연이나 작가의 아집이 아니라고 본다. 감정은 고발과 설득이 작동하기 위한 배터리다. 고발하는 예진우가 최서현 기자와, 설득하는 이노을이 구승효 사장과 감정적으로 이어지는 것은 고발과 설득이 작동하는 방식이 서사적으로 구현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결국 예진우와 이노을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냈는가? 아마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회의적일 것이다. 구원은 요원하다. 구승효 위의 재벌 권력은 여전히 건재하고 언제나 병원은 생명과 이익을 저울질할 수밖에 없다. 새로운 위기는 예고되어있다.



4. 용기와 구원

그렇다면 구원은 어디에 도달했는가? 드라마는 원장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 원장의 죽음은 더 이상 의사들이 알고 있던 병원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뜻한다. 구원은 균열을 지각하는 데서 출발한다. 지금까지의 방식으로는 도저히 나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용기 있는 누군가는 싸움을 준비한다. 그 과정은 지난하고 고독하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싸움의 끝에서 예진우는 예선우의 환영을 떠나보낸다. 용서할 수 없었던 자기 자신과의 화해다. 예진우가 싸움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이노을, 예선우를 비롯한 저마다의 용기를 지닌 사람들이 그를 돕고 지켜봐 주었기 때문이다.

핍진한 드라마는 늘 현실의 직전에 멈춘다. 현실을 앞지르는 건 판타지의 역할이다. 현실의 문제는 비록 드라마 내에서 해결되지 못했지만(해결될 수도 없었겠지만) 이 드라마를 통해 문제들은 수면 위로 떠오르고 비로소 레일 위에 올랐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적어도 똑바로 바라보게 되었고 누가 나와 함께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을 뿐이다.

라이프는 어떻게 한 인간이 용기를 갖게 되는지에 대해 묻는다.

대답하는 시간 속에 어느새 구원은 도착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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