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이는 일, 걸어가는 일, 자라나는 일
사람의 발길이 잦아든 시간.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천천히 녹도를 걷는다. 앞으로 올려 멘 가방에서 사각사각 건사료 알갱이 스치는 소리가 난다. 낮 동안 자라난 수풀을 밟아가며 정원으로 들어선다. 힐끔힐끔 주변을 둘러보고 자세를 조금씩 낮춘다. 제일 안쪽 나무 아래에 이르면 하루동안 비워진 검은색 플라스틱 그릇 두 개가 놓여있다. 몸을 둥글게 말고 앉아 그릇을 닦고, 사료와 물을 나눠 담는다. 작업을 마치면 계단을 올라가듯 조금씩 몸을 펴면서 걸어 나온다. 그제야 달빛이 부드럽고 밤공기가 시원하다.
고양이 밥자리 챙기는 일이 아니었다면, 내가 이렇게 밤마다 차분히 걸을 수 있었을까. 그것도 매일매일. 뭐든지 쉽게 포기하고 도망치기 일쑤였던 내게는 작지만 경이로운 일이다. 지치거나 거르는 일이 없게 하려고 작업을 간소화하고 루틴화하기도 했지만, 정말로 멈출 수 없는 이유는 누군가를 먹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오늘 몸을 덜 움직이면 어떤 고양이는 하루치 식사를 놓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 앞에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는 그저 진부한 수사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내가 밥자리를 돌본 지 2년째다. 고양이는 어느 길에나 있다. 누가 데려다 놓는 것도 아니고 새끼 낳으라고 키우는 것도 아니다. 그저 길에서 태어나서 살아나가는 존재일 뿐이다. 중성화를 해주고 정해진 자리에서 밥 주며 관리하면 사람에게 피해 주는 일 없이 공생할 수 있다. 진이 아무리 이렇게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 사람’은 마치 진이 고양이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밥을 주지 않으면 고양이가 사라질 것처럼 굴었다. 사라지게 할 작정이었는지도 모르지. 그 사람은 결국 내가 자리에 없던 날, 진을 향해 화분을 집어던졌다.
흩어져 있던 밥자리를 정리하고 십여 마리를 중성화 해준 우리 동네에서, 진은 그렇게 잠시 물러나기로 했다. 몇 군데는 주민분이 이어서 맡아주셨고, 나머지는 역시 주민의 자격이 있는 내가 이어받았다. 밥자리는 모두 가능한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옮겼고, 한밤중에만 다니게 되었다. 그릇을 닦는 동안 뒤에서 바스락 소리라도 들리면 가슴이 콩알만 해지는 건 여전하지만, 다행히 무탈하게 유지되고 있다.
내가 매일밤의 청량함이나 계절의 변화 같은 것을 몸으로 느끼게 된 것은 그 덕분이다. 겨우내 얼었던 흙바닥이 봄을 맞아 조금씩 부드러워지는 것이나, 비 온 뒤에 나뭇잎의 초록이 짙어지는 농도 같은 건 나는 평생 가늠해 볼 생각도 못했던 것들이다. 요즘은 어린아이 키재기를 하는 것처럼 수풀이 자라는 속도가 한눈에도 보인다. 누가 애써 꺼내주지 않으면 일주일이라도 집 밖에 나오지 않을 나에게, 조금은 주변을 살필 시야가 생겼다.
제일 단골인 초울이가 며칠 보이지 않고 있다. 그래도 사료 그릇이 줄어있으니 다른 시간에 다녀간 것이겠지. 아무도 보지 않는 시간에 조용히 걸어와 하루를 살아갈 만큼 힘을 얻어갔겠지. 혹은 보이지 않는 내 등 뒤에서 나를 따라 걷고 있는 것일지도. 한낮의 시선을 피해 밤을 걷는 두 걸음이 얼마큼은 닮아있을까. 먹고 먹이고, 함께 걷는 동안 서로 조금씩은 자라난다면 좋겠다. 어둠 속에서 간신히 알아볼 정도일지라도.
못한 일과 아쉬운 일이 몰려드는 시간에, 그래도 누군가를 먹이는 일에 조금은 안도하게 되는 야밤의 산책,
한밤의 고양이 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