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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광 Jun 17. 2024

고양이와 있으면 철학자가 된다

장 그르니에와 고양이 물루

나는 여러 해 전부터, 공부할 때 동무가 되어주고, 내 한결같은 생각과 내 단 하나의 행복에 나를 보다 더 가까이 있게 해 줄 고양이 한 마리를 가졌으면 했다.


알베르 카뮈의 스승으로 유명한 철학자 장 그르니에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고양이 물루>라는 글에서 고양이를 묘사하는 대목들은 속속들이 정확하다. 


“고양이가 다리를 반쯤 편다면 그것은 다리를 펴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고 또 다리를 꼭 반쯤만 펴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희랍 꽃항아리들의 가장 조화로운 윤곽에도 이토록 철저한 필연성은 없다.”


이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의 대가는 이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넋을 놓고 고양이를 관찰했음이 분명하다. 고양이와 지내본 사람은 누구나 알겠지만, 실은 이 관찰은 강요당하는 것이다. 마치 극장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영화처럼, (정지 상태를 포함한) 모든 행위에서 고양이는 사람의 시선을 잡아끈다. 한강 뷰나 바다 뷰, 마운틴 뷰보다도 귀한 고양이 뷰. 진의 집에서 아침마다 마주하는 고요한 풍경은 삶을 그 순간에 멈추게 한다.



나의 첫 고양이 히리는 내가 책상에 앉아 있으면 곁에 다가와 앉았다. 내 손은 자동으로 히리의 몸에 얹힌다. 그러면 히리는 곧장 몸을 빼내어 멀어진다. 잠시 후 다시 다가와 앉는다. 나는 다시 히리를 만진다. 히리는 멀어진다. 이 패턴이 무수히 반복되고 나서야 나는 알았다. ‘곁에 있고 싶다’와 ‘만져도 좋다’는 구분되는구나. 내 기준으로 상대의 언어를 해석하지 말고 상대가 원하는 바를 있는 그대로 존중할 것. 내가 이 단순한 깨달음을 얻기까지 히리가 보여준 인내는 놀라운 것이었다. (짜증을 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가 하면 복돌이의 낯을 가리지 않는 다정한 눈빛은 포용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주변 눈치 볼 것 없이 몸을 비틀어 가며 자기 자세를 찾는 두부는 자유를 재현한다. 몇 시간이고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고양이의 눈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담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는 듯하다. 이쯤 되면 철학자의 눈에만 고양이가 특별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고양이와 함께 있다 보면 철학자가 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카뮈를 키운 그르니에가 있고, 그르니에를 성장시킨 고양이 물루가 있었다고 할까.


다정한 복돌이와 자유로운 두부


그르니에가 동물들이 가만히 엎드려 있는 것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고 고백한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나는 여기서 한 발 더 다가가 보는 것도 즐기는데, 고양이들을 따라 드러누워 보는 것이다. 그러면 홍옥이나 오이 같은 친구들, 사무실이라면 샤샤나 복돌이가 달려와 살을 맞대어 준다. 그 촉감 속에 서서히 심장 박동이 겹쳐지고, 고양이와 나 사이의 차이가 옅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이 여기 있다는 데에 집중하게 된다. 아니 집중이라기보다 그저 그것을 인지하게 된다. 닮아가는 과정, 옮아가는 과정, 혹은 존재하는 순간 그 자체를.


“물루는 행복하다. 세계가 저 혼자서 끝없이 벌이는 싸움에 끼어들면서도 그는 제 행동의 동기가 한갓 환상일 뿐임을 깨달으려 하지 않는다. 놀이를 하되 놀고 있는 제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볼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 그를 바라보는 것은 나다. 조그만 빈틈도 없이 정확하게 몸을 놀려 제가 맡은 역할을 다하고 있는 그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황홀해진다.”


어쩌면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는 이런 것인 것 같다. 자꾸만 뭔가를 생각하고 꾸며서, 의미의 천을 삶에 덧대어 간다는 것. 원래 내가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지 잊어간다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인간이 스스로 우월하다는 사상으로 존재를 증명하고자 했던 것이 개인의 삶과 존재를 덮어버린 것은 아닐지. 나는 인간이라는 카테고리에 묶이기 이전에 그저 존재하는 나 자체일 텐데. 


나는 나 그대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 내가 어떻게 생각하건 나는 꾸며지지 않는 이 자리에 실재하는 무엇으로서 있다는 것. 인지하거나 말거나 나는 나라는 것. 의미와 환상의 그늘에 덮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나를 바라볼 때, 삶은 고양이의 그것처럼 꽤 선명해질지도 모르겠다.


“‘문제’ 속에서 살고 정치, 종교, 혹은 그 밖의 ‘사상’을 가진, 사유하고 추론하는 인간에게 그런 따위의 주제가 합당하기나 한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제발 사상을 좀 가져봐요! 그렇지만 고양이는 존재한다. 그 점이 바로 고양이와 그 사상들 사이의 차이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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