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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광 Jun 13. 2024

땅콩이 없는 땅콩이네

재개발지역 길고양이 이야기 2

예전에 <무한도전>을 보다가 소소한 충격을 받았다. 게임을 진행할 팀을 나누기 위해 노홍철과 박명수가 가위바위보를 해 팀원을 뽑았다. 노홍철이 연달아 이기면서 모든 팀원을 데려가 버렸고, 드디어 마지막에 승리한 박명수. 그의 선택은 노홍철이었다. 그렇게 탄생한 ‘홍철 없는 홍철팀’. 그 발상의 전환이 너무 신선해 나는 웃을 타이밍도 놓치고 팀명을 되뇌었다. 홍철 없는 홍철팀.




우리가 밥자리 이주를 계획하고 있는 재개발지역 고양이들의 밥자리는 여섯 군데 정도로 나뉘어 있다. 대부분은 산기슭으로 점진적으로 이주할 텐데, 그중 한 구역 아이들은 계류장을 설치해서 한번에 이주할 계획이다. 단순히 포획해서 낯선 장소에 풀어버리는 이주방사는 매우 위험하지만, 계류장 안에서 적응을 돕고 천천히 문을 여는 방식의 이주는 권장된다. 원래 이 아이들을 마당냥이로 돌보던 분들이 근처 산의 별채로 가시면서 밭 하나를 계류장 용지로 쓰는 데 동의해 주셔서 가능해진 일이다. 이 아이들이 땅콩이네다. 땅콩이가 없는 땅콩이네.


땅콩이는 이 마을을 우리에게 소개해준 고양이다. 진이 초입에서 처음 고양이들을 발견하고, 마을을 둘러보자는 성화에 못 이겨 다음날 나도 같이 가보았다. 입구의 좁다란 다리를 지나 들어가 보니 유치원이나 교회로 쓰였던 건물이 보였고 나머지는 논밭이었다. 마을 안쪽으로는 전원주택들이 줄이어 있었다. 산줄기에 감싸 안긴 듯 포근하고 한적한 동네였다. 마을 중앙을 가르는 시멘트 길 위에서 우리는 땅콩이를 처음 만났다.


다른 친구 고양이와 함께 걷던 땅콩이는 우리 차를 발견하고는 저벅저벅 다가왔다. 청소년 고양이(?) 정도로 보이는 체구였는데, 아닌 게 아니라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얼굴은 동그랗고 귀는 뾰족한 것이 똘망똘망한 눈으로 거리를 좁혀오는 그 기세에, 우리는 둘 다 할 말을 잃었고 홀린 듯 차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손가락 인사에도 스스럼없이 응해주고 츄르도 맡겨놓았던 것마냥 척척 받아먹었다. 우리는 그 저돌적인 귀여움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버렸다. 이 마을, 이런 고양이들로 가득 찬 거 아니야?



그 뒤로 몇 번 그 앞을 다니면서 바로 그 길 옆 집에서 마당냥이로 돌봄을 받고 있던 아이라는 걸 알게 됐다. 생김에 맞춤한 이름도 그때 집주인분을 통해 들었다. 함께 있던 고양이가 대여섯 마리, 강아지는 그보다 더 많았다. 땅콩이는 집 앞을 순찰하면서 누가 지나다니면 먼저 확인하는 의젓한 고양이였다. 엄마처럼, 대장처럼 집안과 가족들을 지키고 있었다.


얘는 금방 입양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이 들 만큼 극강의 귀여움이었다. 집주인분과 상의 하에 진이 임보 하면서 입양홍보를 하기로 했고, 식구 중에 아직 어리고 몸이 약해 치료가 필요했던 무파사도 함께 데려오게 되었다. 아직은 사무실이 꾸려지기 전이라 둘은 진의 집으로 이동했고 무파사는 곧 좋은 가족을 만나 입양되었다. 땅콩이는 어쩐 일인지 아직 묘연이 닿지 않아 진의 집에서 지내는 중이다. ‘쌈야채 네 남매’가 땅콩이를 엄마처럼 따르고 있고, 땅콩이는 안주인의 역할을 톡톡히 하는 중이다.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달려가 확인하고, 집사들이 잘못한 게 있으면 따끔하게 혼도 내면서.



땅콩이네 아이들은 참 닮았다. 마을 안의 다른 영역들처럼 대게 혈연관계라 그렇겠지만, 유독 땅콩이네는 결속이 강하다. 밥 주는 사람이 나타나면 멀리서도 다 같이 달려 나오고, 날이 좋을 때는 한 몸처럼 마당에 뒤엉켜 배를 뒤집는다. 하루도 지치는 기색 없이 그렇게 반겨주는 모습이, 밥을 챙겨주는 진과 혜진 씨에게는 마음 꽉 찬 보상이 된다. 분명하게도, 고양이는 영역 안에서만이 아니라 관계 속에 산다.


이제 곧 땅콩이네 아이들은 계류장에서 지내게 된다. 우리는 경사가 있던 지대를 갈아엎어서 평탄하게 만들고, 물길도 따로 내었다. 팔레트로 바닥을 보강하고 닭장으로 나온 설치물을 단단히 고정했다. 벽면과 천장을 덧대고 안쪽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비할 일 등이 남았다. 땅콩이가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으로, 우리는 계류장을 쾌적하고 안전하게 꾸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어설프게 했다간 땅콩이한테 혼쭐이 날 테니까.


노홍철이 나가고 나서도 ‘홍철 없는 홍철팀’은 이름을 유지했다. 그건 연달아 가위바위보를 이기며 팀을 구성한 좋은 기운을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땅콩이네 아이들이 새 안식처에서 건강하게 적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가족끼리 똘똘 뭉쳐서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몸집은 아담하지만 마음은 제일 크고 당당한 땅콩이처럼.


땅콩이가 한 자리에 없어도, 우리는 여전히 이 아이들을 땅콩이네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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