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승언 『철과 오크』
송승언 『철과 오크』 (2015, 문학과지성사)
시는 정의 내릴 수 없다. 오히려 스스로 정의에 도전한다. 쓰는 순간 정체성을 고민할 수밖에 없어서, 모든 시는 얼마간 메타시일 것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말하는 건 시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 시에 대한 믿음이라고 해야겠다. 시는 세계가 실패의 산물이라는 걸 인정한다. 급진적인 언어 실험은 그럼에도 가능성을 묻기 위해 시가 택한 방식이다. 시는 그런 질문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시가 아름답지 못하다며 탓하지 말자. 시는 지금도 스스로 찢어가며 싸우고 있으니까. 이것이 절망의 세계에 태어난 시의 운명일지,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시인의 변명일지.
송승언의 시에는 나와 너, 나와 세계, 세계와 세계 등의 경계가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이건 대립이나 어긋남을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없음'을 말하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었다'는 허무주의로서가 아니라, 의미의 경계를 지움으로써 그 지운 자리를 다시 보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구획하고 있는 수많은 경계와 명명이 적확하게 이루어져 있다면, 그 결과들이 지금처럼 엉망일 수는 없다. 우리는 이 '없음'을 바라봐야 한다. 오해만 조심한다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친구가 사라져서 내가 '친구가 없다'고 말했더니, 나더러 친구를 없앴다고 한다면 곤란한 일이니까.
부재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이 이 시만의 새로움은 아니다. 이 시가 좋은 건 그걸 실어 나르는 리듬과 이미지다. 숲이나 나무, 오크, 성 등 중세적 이미지가 많이 사용되는데 이것들을 섞고 뒤바꾸고 지우는 작업이 단문을 타고 경쾌하게 진행된다. 특유의 호흡을 따라 읽으면 이미지가 그다지 다양하지 않은데도 지루하지 않다. <피동사> 같은 작품은 라임에 맞춰 쓴 랩 가사처럼 들리기도 한다. 현대시란 당최 난해들 해서 그 기법을 인정하면서도 즐겨 읽기가 쉽지는 않았다. 알 것 같은 느낌을 따라갈 수 있는 호흡으로 말해주는 시집이 반가운 이유. 친구 같은 시집이 있었다. (15.07.31.)
* 그림이 블랙넛을 닮아 보이는 건, 기분 탓이겠지.
* 씨스타19의 <있다 없으니까>는 얼마나 존재론적인 노래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