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작하고 이미테이션이나 써" 정조가 내린 인공 호박

by 서찬휘


호박은 조선왕조실록에 곧잘 등장하는 편으로 주로 갓끈과 갓끈 고리의 소재로 쓰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 중 재미난 기록으로는 정조 15년(1791년) 4월 18일자가 있다.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초계 문신의 삭시사(朔試射)를 거행하였다. 상이 선전관 등에게 이르기를,

"전에 너희들의 군복(軍服)을 반드시 비단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하교하여 금지시켰는데, 지금 과연 성과가 있는가? 너희들 한 사람이 입는 것은 거의 보통 사람 열 집 재산에 해당한다. 별군직(別軍職)은 새로 임명되면 으레 내려주는 것이므로 갑자기 변혁하기 어렵지만, 너희들은 빈부가 같지 않은데도 한 사람이 지나치게 사치를 하면 백 사람이 본받아 유행이라 하면서 꼭 억지로 그것을 따라가려 한다. 그리하여 극도로 가난한 자라도 구차하게 시속과 어울리려고 하므로 의복만으로 보면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똑같다. 재물을 낭비하는 폐단은 우선 논하지 않더라도 검소함을 숭상하는 뜻으로 볼 때 어찌 이런 일이 용납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조정에서 반드시 살펴 금지하려는 까닭이다."

하고, 또 조밀화(造蜜花)로 만든 영자(纓子)를 별군직청(別軍職廳)에 내리면서 이르기를,

"전립(氈笠)의 영자도 모두 정밀화(正蜜花)를 쓰니, 정밀화를 어디에서 그렇게 많이 구할 수 있겠는가. 또 호박(琥珀) 갓끈은 당상관이 쓰는 것인데, 요즈음 사치 풍조가 나날이 심해져서 문관·음관·무관이나 당상관·참하(參下)를 막론하고 호박이 아니면 쓰지를 않는다. 이 어찌 복장으로 신분의 귀천을 나타내는 뜻이겠는가."

하고, 이어 당하관으로서 호박 갓끈을 쓰는 자를 일체 금지하고 자만호(紫璊瑚)나 자수정(紫水晶)으로 대신 쓰게 하였다.


- 정조실록 32권, 정조 15년(1791) 4월 18일 임술 1번째 기사 <초계 문신의 삭시사를 거행하고 군복을 검소하게 하라고 신칙하다>


별군직청은 국왕 호위 등을 맡던 곳으로 정조는 이들이 형편 생각 않고 비싼 비단으로 군복 해 입는 일에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옷 문제를 거론한 다음 별군직청에 조밀화로 된 갓끈 고리(영자)를 내렸다는 부분이다. 조밀화란 인공 호박으로, 반대말은 정밀화다. 말인즉 갓끈 고리에 너무 비싼 사치품 쓰지 말란 이야기다. 비단 소재 군복과 같은 맥락의 문제 제기였겠는데 가짜 호박을 던지던 정조의 마음은 아마 이런 게 아니었을지.


"야 너네 지금 조선 땅에서는 나지도 않는 진짜 호박을 어디서 그리 많이 구할 수 있다고! 원래 벼슬도 좀 높은 놈들만 하던 게 호박 갓끈인데 요즘은 개나소나 호박 아니면 쓰지도 않는다? 옷으로 신분 구분하는 마당에 이래갖고 구분이 되겠냐? 하씨뭐또 콱마 알아서 기어라 앙?"


호박 갓끈은 정삼품 이상 벼슬아치인 당상관만 하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 아래인 당하관은 호박을 못 쓰게 하고 대신 자마노랑 자수정으로 쓰게 했다는데, 자마노와 자수정이 안 귀한 건 아니었겠지만 아무래도 완전 수입품이었을 호박에 비할 바는 아니었을 터다. 게다가 자수정은 조선 땅에서도 났던 원석이다. 비록 지금은 채굴이 거의 끝났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참고로 자마노는 한자로 자만호(紫璊瑚)라고도 적는데 자줏빛 나는 호박이라 생각했는 모양이다.


한데 재밌는 건 저 때도 가짜 호박을 만들었고 그걸 임금이 "너네 사치 좀 작작하고 이거나 써라"라며 던져줬단 사실이다. 인간의 본능과 이를 제어하려는 제도권 최종보스의 대결이란 참 여러가지를 생각케 한다.


정조의 어진. 영정조시대는 참 다이나믹하고 위태하며 찬란한 시기였다. 이 시기를 끝으로 조선이 급속히 허물어지는 게 안타깝다.


정조 때의 일과는 상관 없이 호박 갓끈의 실례를 들자면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 선생의 갓끈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선생은 임진왜란 때 영남 의병을 일으켜 왜군이 호남의 곡창지대로 들어서는 길목을 막았다. 이 유물은 대구시 망우공원에 자리한 임란호국 영남 충의단 전시관에서 볼 수 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예종의 라피스라줄리 금지령, 연산군이 홀랑 깨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