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삽시다
결혼을 한 달 앞두고 동거를 시작했다. 이제 약속을 하지 않아도 매일 그를 볼 수 있다. 야근을 하든 회식을 하든 집에는 들어온다. 밥은 같이 못 먹어도 잠은 같이 잔다. 동거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남녀가 한 침대를 쓴다고 해서 매일 사랑을 나누지는 않는다는 것.
연애할 때는 모텔에 있을 때도, 그의 집에 있을 때도 시계를 자주 봤다. 기회를 놓치면 다음 주까지 기다려야 했다.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에는 공통점이 있다. 뮤지컬을 보든 드라이브를 하든, 밥을 먹든 술을 마시든 데이트의 끝은 같다. 서로를 바라보는 둘만의 시간. 서로 쓰다듬고 안아주고 키스를 한다. 사랑을 속삭이다 보면 시간의 문이 닫힌다.
같이 살면서 시간의 개념이 사라졌다. 밥을 먹어야 하는 시간, 헤어져야 하는 시간, 통화하는 시간의 경계가 사라졌다. 둘 다 귀가를 하면 자동으로 데이트가 시작된다. 맛집은 검색하지 않는다. 먼저 온 사람이 저녁을 준비한다. 대개의 경우는 나다.
그는 결혼 날짜를 잡은 후부터 야근이 많아졌다.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12시간 근무를 한다. 속은 기분이다. 사귀고 세 달 동안은 공무원 같은 규칙적인 생활 방식을 보였다. 워라밸이 좋은 회사에 다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야근이 갑자기 늘어났다. 거짓말 같지는 않다. 퇴근하고 들어올 때의 그는 아침보다 말라 보였다.
- 오늘 뭐 먹지?
저녁 7시 30분이 되면 카톡이 온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같다. 예약 문자가 아닐까 의심한다. AI 남자 친구는 그렇게 AI 남편이 되어간다.
저녁 준비는 내게 생소한 일이다. 그건 대체로 엄마의 몫이었다. 혼자 밥을 먹을 때는 냉장고에서 꺼내먹거나 반조리 식품을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었다. 떡볶이를 사 오거나 피자를 배달시켰다. 요리는 왠지 거창했다.
이제는 둘이다. 다락방에서 탈출한 집기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 그들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할 수 없다. 한 상 차려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집에 가려면 동네 마트와 채소 가게를 지나야 한다. 예전 같으면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샀겠지만, 이제는 다르다. 콩나물, 양파, 무, 대파 같은 것들을 산다. 국이나 찌개를 끓일 때 꼭 필요한 채소다. 대파가 삐져나온 장바구니를 들고 귀가하는 마음은 사뭇 비장하다. 바게트를 안고 귀가하는 파리지앵과의 정면 승부를 꿈꾼다.
요리라고 해봤자 대단한 건 아니다. 저녁 메뉴는 대개 김치찌개, 달걀찜, 어묵탕, 순두부찌개 등이다. 마트에서 원팩 제품을 사서 물과 채소를 넣고 적당히 끓이면 된다. 매우 쉽다. 밥은 처음에 몇 번 실패했다. 쌀과 오곡을 혼합해서 잡곡밥 모드를 선택했는데 너무 질게 되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백미 모드로 밥을 지었다. 그제야 밥알이 살아난다. 퇴근 시간에 맞춰서 차려지는 집밥에 그가 행복해한다.
“집밥이 제일 좋아. 맛있어, 맛있어.”
엄지를 치켜세우며 그가 활짝 웃는다. 가끔은 두 공기도 먹는다.
친정에 있을 때는 무료했다. 오늘은 어제와 비슷했고, 내일도 오늘과 다르지 않았다. 새로운 일은 생기지 않았다. 이 집은 다르다. 집이 살아 있다. 돌봐야 할 것들이 늘어간다. 하루가 금방 지나간다. 택배를 받거나 외출에서 돌아오면 먼지가 쌓인다. 장판이 흰색이라 떨어진 머리카락이 잘 보인다. 하루만 청소기를 안 돌려도 발바닥에 먼지가 묻는다. 빨래는 평일에 한 번, 주말에 한 번 한다. 세탁기는 그가 돌리고, 빨래가 마르면 제 위치에 두는 건 내가 한다.
물건들이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다. 필기도구, 약통, 화장품 등을 서랍 별로 정리한다. 안 하면 티가 나고, 해도 생색이 안 난다. 냉장고도 마찬가지다. 채소와 과일은 금방 상한다. 자주 확인하고 빨리 먹어야 한다.
내 집이고, 내 살림이라 처음에는 재미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갇힌 기분이 든다. 설거지하고 나면 다음 끼니를 준비해야 한다. 화장실의 머리카락은 청소해도 계속 나온다. 집안일이 좀비처럼 되살아난다. 무섭다. 도망가려고 해도 집안일을 해야 나갈 수 있다. 방 탈출 게임이다. 외투는 여기, 가방은 저기, 양말은 건조대 위에 있다. 외출 준비도 만만치 않다. 아직은 모든 게 혼란스럽다.
나와는 달리 그는 한결같다.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집에 온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밥을 먹는다. 배부르면 눕는다. 그대로 잠이 들기도 한다. 집에 오면 운전대를 잡은 사람처럼 옆모습만 보여준다. 세상 평화롭다. 내 안에서 뭔가가 차곡차곡 쌓여갔다.
청첩장과 식권이 온 날이었다. 접지 않은 청첩장이 400장 도착했다. 접힌 것보다 장당 백원이 싸다. 청첩장을 두 번 접고 봉투에 넣는다. 스티커를 붙인다. 봉투를 뒤집어서 주소 라벨을 붙인다. 이 단순한 작업에 두 시간이 걸렸다. 그다음은 식권이다. 볼펜으로 1부터 숫자를 눌러 적는다. 도장을 인주에 묻혀 찍는다. 400번 반복한다. 11시가 훌쩍 넘어간다.
띠디띠띠. 찰칵. 청첩장과 식권 작업이 끝나자마자 그가 들어온다. 절묘한 타이밍이다. 노린걸까?
“나 왔어.”
“응.”
내 기분을 눈치채 주기를 바라면서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도 피곤한지 안방으로 들어간다.
“청첩장 작업 다 했어? 식권까지?”
“…… ”
거실에서 꼼짝도 안 하자 그가 다가온다.
“나 봐봐. 화났어? 우는 거야?”
그랬다.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결혼 준비를 하면서 처음이다. 그가 나를 안는다. 한참을 말없이 있었다.
“결혼 준비 나 혼자 해? 가전제품도 내가 받고, 장도 내가 보고, 저녁도 내가 차리고, 청소도 내가 하고. 자기는 도대체 하는 게 뭐야?”
마침내 폭발했다. 집안일은 내가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서, 저녁은 내가 먼저 퇴근해서, 청첩장은 오늘 왔으니까 내가 하면 어때, 라고 했지만 서운하다. 나는 마음이 넓지 않다. 그가 일부러 바쁜 건 아니지만 결혼을 앞두고 바쁜 게 짜증 났다.
한바탕 쏟아내고 안방으로 들어간다. 벽을 보고 돌아눕는다. 눈물이 계속 난다. 돌아누운 채로 잘 생각이다. 쿠션 하나 들어갈 공간밖에 없다. 갑자기 그의 얼굴이 쑥 나타난다. 침대와 벽 사이의 공간으로 몸을 던진 것이다. 종이 인간이다. 그가 내 얼굴을 바라보며 눈을 끔뻑거린다.
“귀여우니까 봐줘, 응?”
고양이처럼 말한다. 그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표현이다. 나는 삐치면 쉽게 풀리지 않는다. 내일까지 화를 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웃음이 난다. 그가 속없이 부리는 애교에 마음이 풀린다. 사실은 보고 싶었다.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외로웠다. 한 시간마다 시계를 보며 언제 올지 기다렸다. 이 집은 그가 있어야 완성된다.
그는 말수가 적은 대신 표정 모사를 잘한다. 분노에 찬 형사 표정, 조카의 애교 표정, 마라토너 노인의 숨넘어가는 표정 3종 세트로 나를 웃긴다. 최고로 좋아하는 캐릭터다. 내 화가 풀린 것을 확인하고, 그는 아이처럼 쓰러져서 금세 잠이 든다. 잠든 그를 가만히 바라본다. 그는 저녁이 되면 내 옆으로 온다. 앞으로도 내 옆에 있을 것이다. 내가 그를 선택했고, 그가 나를 원했다. 우리가 함께 있는 이유다.
결혼은 가장 오랫동안 사랑할 사람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평생 친구이자 룸메이트다. 그가 바쁠 때는 내가 리드하고, 내가 바쁠 때는 그가 나서면 된다. 조급해하지 말자. 우리는 달리기가 아니라 마라톤을 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