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자대면
기훈 씨를 만나기 전 다른 남자가 있었다. 그는 연하였고, 우리는 많은 주말을 함께 했다. 그는 스킨십을 좋아하고, 보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 나는 그를 위해 돈 쓰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데이트 비용은 전부 내가 부담했다. 그는 만날 때마다 선물을 사달라고 했고, 나는 조건 없이 사주었다. 우리는 가족에게 인정받은 사이였다. 내 페이스북은 한때 그의 사진으로 도배되었다.
그에게 결혼 소식을 알리는 건 쉽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을 때 그는 현실을 부정했다. 나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자주 못 보게 되는 거냐며, 부끄러움도 무릅쓰고 울었다. 나는 어쩔 줄 몰랐다. 나의 결혼이 그에게 상처가 될지 몰랐다. 그가 축복해주리라 생각한 건 착각이었다.
결혼 소식을 알린 후로 한동안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그를 만나기로 했다. 삼자대면이다. 나의 결혼을 유일하게 반대한 사람, 조카다.
충청북도 진천군 만승면 회죽리. 초등학교 때까지 방학이면 오빠와 함께 한 달씩 와 있었다. 고구마를 싸들고 산에 오르고, 팬티만 입고 개울가에서 수영하고, 겨울에는 비료 포대로 눈썰매를 탔다. 코흘리개 시절의 추억이 가득한 시골에 예비 신랑과 같이 온 기분이 묘했다. 나의 시절이 바뀌고 있다.
시골집은 철제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넓은 마당이 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마당에서 엄마와 오빠, 삼촌이 바비큐 파티를 준비 중이었다. 그를 처음 보는 오빠와 삼촌이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민망할 정도로 빤히 쳐다본다.
“어서 와라. 차 많이 막히지? 사랑방에 앉아 있어.”
원래대로라면 부엌에 가서 전을 부쳐야 한다. 그와 함께 있으니 프리 패스(Free pass)다. 그를 혼자 둘 수 없어 가만히 앉아 상이 차려지길 기다린다. 고기가 구워지고, 엄마와 오빠, 그와 나, 이렇게 넷이 둘러앉았다. 어색한 분위기를 이겨내려고 유럽 여행 에피소드를 꺼낸다.
“첫날 스히폴 공항에 도착했는데, 버스 티켓을 어디서 사야 할지 모르겠는 거야. 근데 기훈 씨는 검색만 하고 있고. 답답한 마음에 나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었어. 나중에 신용 카드로 긁으면 되는 걸 알고 허무했지 뭐야.”
고생했던 에피소드를 두어 개 더 이야기한다. 내 얘기를 다 들은 오빠가 한마디로 정리한다.
"난 놈이네, 난 놈이야."
나는 가족 중 서열이 맨 아래지만, 늘 당당했다. 집에서 원하는 건 대체로 내 뜻을 관철했다. 귀찮고 힘든 일은 잘 나서지 않았다. 부려먹기 힘든 캐릭터인 나를 움직인 그에게 오빠가 깊은 감명을 받았다. 임자를 만났다고 생각한 것 같다.
대화가 한창일 무렵, 낮잠에서 일어난 다우가 나타났다. 그와의 첫 대면이다.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다우가 오빠를 찾아 안기고, 그를 보는 둥 마는 둥 한다. 하지만 흘끔거리면서 의식하는 걸 알 수 있다. 그가 다우에게 친근하게 대하기를 바랐지만, 그 역시 말이 없다. 그의 내성적인 성격이 아쉽다.
"다우야, 고모부한테 인사해야지. 다우는 고모 결혼하는 게 싫어?"
엄마는 다시 노련한 사회자가 된다.
“고모 결혼하면 할머니네 가도 볼 수 없잖아. 이제 고모랑 놀려면 고모부한테 허락받아야 하잖아. 아기 낳으면 다우랑 안 놀아줄 거잖아.”
"그럼 고모 결혼식에 안 갈 거야?"
“수영복 입고 갈 거야.”
일곱 살의 다우가 보여줄 수 있는 강한 반항이다. 내년에 다우가 학교에 가면 고모는 누구랑 놀지, 라고 말하고 싶지만 참는다.
고기를 먹고 마당으로 나왔다. 다우가 오빠와 축구를 한다. 어린이 축구교실을 다니는 다우는 발놀림이 좋다. 다우가 야심차게 찬 축구공이 날아와 그 앞에 떨어진다. 웬일로 그가 일어난다. 동그랗게 눈을 뜬 다우에게 공을 차 준다. 그가 자연스럽게 축구에 합류한다. 몇 번의 패스로 다우가 마음을 조금 연 것 같다. 축구공처럼 관계가 둥글게 풀리는 듯하다.
우리 가족과 충분한 시간을 함께한 후, 그가 다시 대전으로 떠났다.
"다우야, 고모부 어때?"
엄마가 묻는다.
"멋있어.”
다우가 조그맣게 말한다. 그를 고모부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시아버지의 결혼 허락을 받은 것만큼 기쁘다. 이제 우리의 결혼을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