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바람 Feb 02. 2019

서른여덟, 6개월 만에 결혼하다 #12

예비 시댁에서의 합방

일요일 오전에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하루 만에 그를 보니 반갑다. 비행기에서 혼자 오면서 그의 빈 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그는 있는 듯 없는 듯하지만, 없으면 허전하다. 내 옆에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성과는 싸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제법 잘 맞았다. 그가 잘하는 것과 내가 잘하는 것이 달라서 상호보완이 되었다. 그는 길을 잘 찾고, 나는 영어를 잘한다. 그가 빨래와 짐 정리를 하면 내가 요리를 했다. 내가 계획을 세우면 그가 구체적으로 실행을 했다.


열흘 동안 동지애가 생겼다. 앞으로 어떤 일이든 헤쳐나갈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긴다. 좋은 풍경도 함께 보았고, 체력이 바닥일 때 서로 끌어주었다. 길도 잃었고, 더위에 힘들었다. 둘이라서 더 좋았고, 덜 힘들었다. 삶이 지루할 때 꺼내볼 수 있는 둘만의 추억이 생겼다.


공항버스를 타고 서초동으로 갔다. 엄마가 예비 사위에게 아침상을 차려준다. 그가 소주를 마시고 내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유럽에서는 비싸서 못 마셨던 소주다. 유럽의 시차 부적응자였던 나는 한국 시각에 바로 적응한다. 컴퓨터로 이메일을 확인한다. 니스에서 찍은 웨딩 사진이 왔다. 로렌스의 일하는 속도가 엄마의 추진력만큼 빠르다. 사진은 24장이고, 모두 마음에 든다. 지중해의 햇살이 사진을 완성해주었다. 그가 무릎을 꿇고 꽃을 건네는 사진이 특히 마음에 든다. 여러모로 색다른 웨딩 사진이다. 곧바로 포토 앨범을 제작한다. 무슨 일이건 미루면 끝이 없다. 앉았을 때 해치워야 한다. 한 시간 만에 편집을 마치고 친정, 시댁, 우리 것까지 총 3권을 주문했다.


오후에 예식장 상담이 있다. 그가 가락동으로 가지 않고 우리 집에 온 이유다. 예비부부는 대개 6개월에서 1년 전에 예식장을 계약한다. 우리처럼 결혼이 임박해서 잡는 경우는 많지 않다. 올해 말까지 예약되지 않은 타임은 예식이 잡히지 않을 확률이 높다. 그래서 잔여 타임은 할인 혜택이 크다. 마침 11월 11일 오전 11시가 비어 있다.


상담 실장이 식대 할인, 예식장 무료 대관, 피아노 3중주 등 파격적인 조건을 내건다. 현란한 말솜씨에 우리는 일본 고양이 인형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예식홀 크기도 적당하고, 신부 대기실도 환하다. 사진이 잘 나올 것 같다. 다른 데를 알아보러 다니기 귀찮다. 집도 한 번에 계약했는데 결혼식은 기껏해야 하루 이벤트다. 여기가 좋다고 하니 그도 마음에 든다고 한다.


이 모든 혜택은 상담 당일에 계약금을 입금해야 적용된다. 마음이 급해진다. 엄마한테 전화했다. 아무 날짜나 좋으니 올해 안에만 하라고 한다. 그의 부모님 허락만 받으면 된다. 그가 예비 시어머니와 먼저 통화한다. 시어머니는 좋다고 하신다. 마지막으로 시아버지와 통화한다. 그의 표정이 좋지 않다. 시아버지의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린다.


“그렇게 중요한 걸 당장 결정하라는 거냐? 밖이니까 저녁에 얘기하자.”


시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시아버지가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이라고 들었다. 결혼의 첫 번째 난관이다. 좋은 조건에 계약하고 싶었던 우리는 시무룩해졌다. 4호 고모가 점지해준 날짜가 물 건너가자 섭섭한 마음이 든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시아버지는 결혼식을 대전에서 하고 싶어 하셨다.


결혼식이 불투명해졌다. 언제, 어디서 할지 모른다. 차라리 잘 됐다 싶기도 하다. 당분간 집에만 집중할 수 있다. 월요일에 은행에 가서 주택담보대출을 신청했다. 정부가 최근에 발표한 부동산 대책 때문에 불안하다. 나도 모르는 결격 사유가 있을지 모른다. 통장에 돈이 꽂히기 전까지는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한다. 상담원이 필요한 서류 목록을 알려준다. 서류 준비에만 2~3일이 필요하다.


리모델링을 알아봐야 한다. 리모델링은 집을 뜯어고치는 대공사다. 창틀을 새로 하고, 도배를 하고, 장판을 깔아야 한다. 전기 공사와 주방 공사를 하고, 안방에 붙박이장을 설치해야 한다. 현관문을 새로 칠하고, 화장실과 지하방도 손봐야 한다. 이번 주 토요일부터 추석 연휴다. 시간이 빠듯하다.


엄마와 부동산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두 군데에서 견적을 받았다. 시공업자들이 차례대로 방문해서 견적을 낸다. 창틀 아저씨가 오고, 도배 아저씨가 오고, 전기 아저씨가 왔다. 내 깜냥으로는 흥정에서 밀린다. 흥정은 엄마 몫이다.


분야별로 몇백만 원이 오가는 공사다. 평소의 지출과는 단위가 다르다. 공사 견적에 흠칫 놀란다. 집만 사면 끝인 줄 알았는데 리모델링 비용도 만만치 않다. 어떻게든 깎아야 한다. 엄마는 인건비 빼면 남는 게 없다는 아저씨들과 노련하게 밀고 당긴다. 마침내 엄마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만하면 싼 거야."


엄마가 예상보다 견적을 잘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큰돈이다. 내 집이 생긴다는 건 돈이 아주 많이 드는 일이다. 호기롭게 지출했던 카드 사용 명세가 스쳐간다. 이미 늦었다.


*****

“이번 추석에 대전에 다녀와라.”


예식장 계약이 날아가고 며칠 뒤, 엄마가 말했다. 긴급 조치다. 고집스러운 시아버지라고 해도 며느리 얼굴을 보면 마음이 풀릴 거라고 했다. 시어머니만 뵈었지 시아버지한테는 아직 인사를 못 드렸다. 그의 집안에서 최종 의사 결정권자가 시아버지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시아버지는 집안의 대소사에 세심하게 관여하셨다. 


그가 대전행 기차표 2장을 끊었다. 처음으로 남자 친구와 예비 시댁에 간다. 게다가 하루 자고 와야 한다. 낯가림이 없고 환경에 잘 적응하는 나지만, 그런 문제가 아니다. 긴장된다. 유럽 여행을 다녀온 지 일주일 만에 다시 짐을 쌌다.


수서역에서 그를 만났다. 대전까지는 한 시간 거리다. 지하철 2호선을 타고 한 바퀴 도는 것보다 짧은 거리다. 양손 가득 선물을 들고 시댁 현관문 앞에 도착했다. 시부모님과 시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덜컥 긴장된다. 최종 면접을 앞둔 신입사원이 된 기분이다. 침을 꿀꺽 삼킨다. 무조건 웃자. 대문이 열리고 선물을 먼저 드려놓았다. 갈비 세트와 조기 세트, 그리고 대전에 와서 산 과일 세 상자다.


"뭘 이렇게 바리바리 사 왔대. 차도 없으면서."

"아니에요. 택시 타고 편하게 왔어요."


가까스로 현관에 들어선다. 시아버지와 눈이 마주친다. 시아버지는 부리부리한 눈매에 단단한 몸집이다. 그보다 훨씬 건강해 보이고 근육질이다. 전화 목소리로 예상은 했지만, 보통은 아니시겠다는 생각이 든다. 각오를 단단히 한다. 절을 드리려고 하자 시아버지가 한사코 거절하신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준비해온 선물들을 꺼냈다. 시아버지에게는 로열 살루트를, 시어머니와 시누이에게는 화장품을 드린다. 시조카 두 명에게는 용돈 봉투와 초콜릿을 준다.


"둘이 같이 살기로 했다면서."


시아버지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셨다. 두 가지를 서운해하셨다. 하나는 집이고, 하나는 예식장이다. 집을 살 때 허락을 받지 않은 것, 결혼식을 서울에서 올리고 싶어 하는 것. 집을 구매하게 된 과정을 구구절절 설명 드린다. 좋은 매물이라 급하게 계약을 했고, 양가의 도움없이 그와 나 둘의 능력으로 해결하겠다고 했다. 가장 중요한 결혼식장 문제는 의외로 쉽게 결론이 났다. 순희 고모는 시아버지의 누나다. 동생인 시아버지에게 입김을 넣은 것 같았다. 순희 고모의 설득이 통했는지 시아버지는 대전 결혼식에 대한 미련을 버리셨다. 묵묵히 있던 그가 유럽 여행 앨범을 꺼낸다. 좋은 타이밍이다. 분위기가 부드러워진다.


"나는 점심 약속 있으니까 너희들끼리 점심 먹어라. 저녁에 보자."

시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신다. 현관까지 깍듯이 배웅을 나간다.


“처음 봤는데 남 같지가 않네. 우리 식구구만.”

신발을 신으며 시아버지가 말씀하신다. 기다리던 합격 통보다. 시아버지가 나에게 악수를 청하신다. 그제야 긴장이 풀린다. 시아버지가 나가자 분위기가 바뀐다. 그림자처럼 있던 아주버님이 식탁 의자에 앉고, 시조카 두 명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나에게 온다. 주인이 방문을 닫고 나가면 살아 움직이는 인형들처럼 각자의 목소리를 찾는다. 활기가 넘친다.


우리는 다 같이 수목원 산책을 하고, 바지락 칼국수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오후 4시다. 시누이가 온천을 가고 싶어 했다. 같이 가자는 어머니의 제안을 사양하고, 그와 둘이 남았다. 안방에서 잠시 눈을 붙일 셈이었다. 누운 지 십 분쯤 지났을 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아버지다. 뜻하지 않게 그와 나, 시아버지의 티 타임이 생겼다.


"앨범 좀 가져와봐라."

시아버지가 우리의 앨범이 궁금하셨던 눈치다. 한 페이지씩 유심히 보신다. 둘이 닮았다고 하신다. 그러고 보니 사진 속의 우리는 오누이처럼 닮았다.


“기훈이가 내 아들이지만, 착하기만 하고 강단이 없어서 늘 걱정이었다. 그런데 진영이를 보니 똑 부러지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이네. 기훈이는 카리스마 있는 여자가 휘어잡고 살아야 해.”


시아버지의 마음이 완전히 풀린 것 같다. 얼굴을 보여주면 일이 잘 풀릴 거라던 엄마의 생각이 옳았다. 대전에 내려오길 잘했다.


저녁에는 집에서 고기를 굽고 소주를 마셨다. 시아버지가 주는 술을 열심히 받아마셨다. 시아버지가 그런 나를 기특하게 바라보신다. 눈빛이 부드럽다. 잘 시간이 되자 시아버지가 우리의 잠자리를 봐주신다. 우리가 오기 전까지는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자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그와 나의 합방을 허락하신 걸 보면 나를 며느리로 받아들이신 것 같다.


“외숙모, 안녕히 주무세요.”


민서와 민준이가 나를 외숙모라고 부른다. 그의 가족이 된 것 같아 기분이 묘하다. 다음날 아침에는 나의 시골로 출발했다.


이번에는 그가 긴장할 차례다.

이전 11화 서른여덟, 6개월 만에 결혼하다 #11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