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바람 Jan 31. 2019

서른여덟, 6개월 만에 결혼하다 #10

신혼집이 딱!

“여행 가기 전에 예비 사위 한번 더 보여주고 가.”


엄마의 부탁이다. 아니 명령이다. 서른이 넘은 후부터 결혼은 불편한 주제였다. 결혼과 관련된 얘기가 나오면 슬그머니 내 방으로 왔다. 사위라는 존재는 드라마와 리얼리티 예능에서 나오는 하나의 캐릭터였다. 그런데 엄마가 예비 사위의 실물을 보게 되었다. 그날부터 엄마는 사위라는 단어를 입에 자주 올렸다. 그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싶어 했다. 그와 내가 연애만 하다 헤어질까 봐 불안한 것 같았다.


여행을 앞두고 서초동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를 만날 때의 엄마는 평소에 내가 알던 엄마가 아니다. 엄마는 부드럽고 다정하고 우아했다. 세심하게 질문을 골랐다. 분위기는 대체로 화기애애했다.


“집은 전세인가?”


엄마가 고기를 뒤집으며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로 묻는다. 노룩패스다. 오늘 날씨가 좋지? 라고 물어보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나라면 선뜻 물어보지 못했을 질문이다. 그가 전세라고 대답한다.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월세가 비용이라면 전세는 자산이다. 그는 쾌적한 원룸에서 월세를 내는 대신 불편한 방과 목돈을 택했다. 한 달 전에만 말하면 방을 뺄 수 있다고 하자 엄마의 눈이 반짝인다.


“우리 딸 방이 궁금하지? 들어와서 차 한잔하고 가게.”


엄마가 그를 초대한다. 예상했다. 나는 엄마를 잘 안다. 그럴 줄 알고 내 방을 미리 치워놨다. 그의 자취방을 보고 난 뒤라 우리 집에 들어올 때 마음이 편하다. 우리 집도 작은 빌라다. 거실에 앉은 그의 모습이 자연스럽다. 그는 어디에나 어울린다.


"돈은 얼마나 모아놨나?"


차를 마시다가 엄마가 돌직구를 날린다. 엄마는 노련한 사회자다. 결혼을 염두에 둔 질문이다. 토크쇼에서 경제 프로그램으로 채널이 순식간에 전환된다. 엄마의 질문은 나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했다. 엄마는 내 통장 잔고를 모른다. 나는 저축액이 많지 않다. 매달 하고 싶은 것과 사고 싶은 게 생겼고, 저축은 남은 돈으로 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 구체적인 결혼 계획이 없었다. 어떻게든 되겠지,하는 생각이었다. 돈 얘기는 엄마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선뜻 말하기 어려운 주제였다. 우리는 얼결에 서로의 경제 사정을 얘기했다. 대화가 한창일 때 엄마의 휴대폰이 울렸다. 용인에 사는 이모다.


"내일 남현동에 집 보러 서울 올라간다. 얼굴이나 보자."


절묘한 타이밍이다. 신혼집을 어느 지역에서 구할지 얘기하고 있을 때였다. 이모는 부동산에 관심이 많다. 좋은 집이 나오면 지인들에게 추천을 해주기도 하고, 직접 이사하기도 했다. 엄마는 이모가 보러 온다는 집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집값도 위치도 적당하다. 다음날 저녁에 엄마와 이모를 따라 집을 보러 가기로 했다.


나는 부동산에 대해 아는 게 없다. 38년간 엄마 품에서 캥거루족으로 살았다. 집 계약은 결혼과 함께 미뤄둔 큰 숙제였다. 독립을 꿈꿔본 적은 있지만, 기껏해야 월세나 전세였다. 무엇보다 집에서 나갈 명분이 없었다. 대학은 집에서 30분 거리였고, 회사는 20분 거리였다. 집을 보러 가는 건 처음이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오늘은 집 보는 요령에 대해 한 수 가르침을 받을 생각이다.


사당역에서 이모를 만나 부동산에 갔다. 부동산 아저씨가 이모를 반갑게 맞이한다. 아저씨가 열쇠 꾸러미를 들고 앞장서서 걸어간다. 뒤따라가며 주변을 살핀다. 나에게 사당역이란 술집과 밥집, 모텔의 집결지다. 하지만 5분 남짓 떨어진 거리에 완벽한 주택가가 있다. 사당 초등학교 주변으로 주택이 빼곡하다. 초등학교와 주택, 등산로를 둘러싸고 마트와 정육점, 채소 가게, 과일 가게 등이 즐비하다. 주부들의 성지다.


"여깁니다."


빌라 1층이다. 집이 생각보다 넓다. 효율적인 구조라 동선이 좋다. 요리를 하고, 그와 거실에서 맥주를 마시며 텔레비전을 보는 상상을 해본다. 자연스럽다. 이 집은 우리와 어울린다. 특이하게도 반지하에 방이 하나 더 있다. 원 플러스 원이다.


지하방은 그의 원룸과 비슷한 크기다. 방 한 개와 부엌 겸 화장실로 된 구조다. 이 공간은 운동방으로 꾸미는 게 좋겠다. 거꾸리와 자전거, 스쿼트 머신을 갖추고 벽면 한쪽을 대형 거울로 꾸민다. 짐볼과 요가 매트를 준비해서 커플 스트레칭을 한다. 집에서 운동하는 홈 짐(Home Gym)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혁명이다.


부동산 아저씨가 본격적으로 브리핑을 한다.


"이 빌라는 재개발될 가능성이 높아요. 5년에서 10년 이내에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대지 면적이 좋아서 아파트를 지으면 보상을 잘 받을 거예요. 거주하기에도 좋고, 투자 가치도 충분합니다. 관악산 공기가 맑아서 비염 있는 사람도 금방 나아요. 언제 계약될지 몰라요. 서두르셔야 해요."


엄마와 이모가 고개를 끄덕인다.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부동산은 1도 모르는 나 역시 이 집이 마음에 든다. 위치가 좋다. 출퇴근하기에도 좋고, 친정과도 가깝다. 서울 집값은 한 해가 다르게 뛰고 있다. 연봉 오르는 속도보다 집값 오르는 속도가 빠르다. 전세로 2년마다 이사를 하는 것보다 집을 사는 게 낫다. 부족한 돈은 대출받으면 된다.


"하늘에서 집이 떨어졌네. 이건 사야 해."


엄마가 귓속말을 한다. 마음이 급해진다.


"저 잠시 전화 좀... ”


밖으로 나와 그에게 집의 동영상과 사진을 보내고 전화를 걸었다. 이 집의 장점에 대해 신나게 설명했다. 내가 이 집과 사랑에 빠졌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가 내 말을 신중하게 듣는다.


“계약금 있어?”


은행 계좌에 현금이 있다. 좋아, 저지르는 거야. 결심이 섰다. 부동산에 들어가서 엄마에게 신호를 보냈다. 부동산 아저씨가 집주인과 매매 가격을 흥정한다. 가계약금을 보내고 내일 저녁에 만나서 계약서를 쓰기로 했다. 유럽 여행 3일 전이다.


*****

“집에서 도움 받을 거야?”

”아니.”

”나도 그럴 생각 없어. 우리 힘으로 해보자.”


우리가 저지른 일은 우리가 수습하기로 했다. 모아놓은 돈은 많지 않지만, 둘의 월급을 합치면 제법 큰 돈이다. 이제껏 쓰면서 살았으니 앞으로는 모으면서 살면 된다.


화요일 저녁, 집주인을 만나서 계약서를 작성했다. 내 인생의 첫 집이다. 1차 중도금은 여행 당일인 이틀 뒤에 보내기로 했다. 머릿속이 바빠진다. 집을 사는 것에 비하면 유럽 여행은 아무것도 아니다. 날짜에 맞춰 돈을 준비해야 한다. 서둘러 신용 대출을 알아본다. 다행히 1금융권에서 대출을 받았다. 높은 신용 등급을 유지해온 과거의 나에게 감사하다. 빌린 돈은 미래의 내가 갚으면 된다.


생각지도 않게 집이 덜컥 생겼다. 집을 산다는 것은 요가 일 년 회원권이나 피부 관리실, 겨울 코트와는 단위가 다르다. 앞으로의 일정을 그려본다. 2차 중도금을 입금하고 리모델링 공사를 한다. 공사가 끝나면 그가 이사를 온다. 더 이상 그의 원룸에 가지 않아도 된다. 주말은 대체로 그와 이 집에서 보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평일은? 평일에도 한 번씩 이 집에서 잔다고 가정하면 주 3일은 그와 보내는 셈이다. 반 동거다. 결혼을 하게 된다면 내년 봄이나 가을 정도가 적당할 것 같다.


결혼식은 언제 할지 모르지만 웨딩 촬영을 해야 한다는 건 안다. 포토 테이블과 식전 영상에 들어갈 사진이 필요하다. 둘이 찍은 사진이라고는 100일에 찍은 게 전부다. 생략하거나 대체할 방법이 없을까? 묘수가 떠오른다. 유럽 여행을 가서 사진을 몇 장 찍어오면 좋을 것 같다. 집 장만과 결혼 앞에서 유럽 여행은 걸림돌이다. 그 여행을 결혼 준비 과정으로 접근하면 관점이 달라진다. 내 의견을 얘기하니 그가 적극적으로 찬성한다. 인터넷에서 ‘셀프 웨딩 촬영’을 검색했다. 흰 원피스와 화관, 부케, 셀카봉만 있으면 된다. 생각보다 쉬워 보인다. 우리에게는 유럽 어드밴티지가 있다. 대충 찍어도 지중해의 햇살이 사진을 완성해줄 것이다. 여행 날짜가 코앞이라 인터넷에서 하루 배송 상품을 골랐다. 옷장에서 괜찮은 옷을 쓸어 담았다. 유럽 여행은 그렇게 프리 허니문(Pre honeymoon)이 되었다. 이래저래 정신없는 며칠이었다.


여행 전날 밤, 짐을 싸고 있었다. 긴 일정이라 짐싸는 게 만만치 않다. 그때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셋째 고모집에 친척들이 모여 있으니 오라는 호출이다. 귀찮지만 둘러댈 핑계가 없다. 고모집은 3분 거리다.


이전 09화 서른여덟, 6개월 만에 결혼하다 #9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