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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바람 Jan 30. 2019

서른여덟, 6개월 만에 결혼하다 #9

자취방 침투 작전

8월은 굵직한 이벤트의 연속이었다. 홍콩 출장을 다녀왔고, 세미 상견례를 했다. 주말에는 유럽 여행 준비로 바빴고, 휴가 전에 처리할 업무가 많았다. 우리의 백일도 있었다. 기념일을 제대로 챙기는 건 무리였다. 선물은 생략하고 이태원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평소에 안 가던 장소를 가야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냉장고를 부탁해'의 미카엘이 하는 레스토랑에 갔다. 연어 스테이크와 가지 요리, 와인 두 잔을 주문했다. 처음으로 커플 셀카를 찍었다.


식사가 끝날 무렵, 그가 가방을 뒤적거려 네모난 나무토막을 꺼냈다.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의 직사각형 물체다.

"백일 기념 선물이야. 나도 똑같은 거 있어. 커플템이야.”


나무토막을 자세히 보니 1cm 정도의 홈이 파여있다. 원목으로 만든 휴대폰 거치대다. 취미가 목공이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가 만든 물건을 보는 건 처음이다. 지난주 토요일에 낮잠 잔다고 깨우지 말라던 게 생각났다. 목장갑을 끼고 전기톱으로 원목을 자르고 사포질을 하는 그의 모습이 어렵지 않게 그려진다. 이 나무토막에는 그의 두 시간이 담겨 있다. 낭만적이기보다는 실용적이다. 그와 어울린다.


그가 작은 카드를 건넨다. 처음이다. 그에게 몇 번 편지를 쓴 적이 있지만, 답장을 받은 적은 없었다.


- 나같이 무뚝뚝하고 눈치 없는 놈하고 100일이나 만나줘서 고마워. 1,000일, 10,000일 함께 하자. 뜻밖의 프러포즈! 사랑해.

캐릭터를 키우는 기분이다. 그가 피카츄에서 라이츄로 진화하고 있다. 나는 그를 길들이는 지우다.


*****

- 집에는 언제 초대할 거야?

- 좁고 지저분해서 안 돼.


세 번째 거절이다. 그는 가락동 원룸에 혼자 산다. 100일간 강아지처럼 근처를 맴돌았지만, 건물 안까지 들어간 적은 없다. 집에 대해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다만 멀쩡한 집을 두고 주말마다 모텔을 찾아다니는 게 싫었다. 숙박비에 외식비까지, 데이트 비용이 만만치 않다. 요리하고 영화를 보며 뒹굴뒹굴하고 싶다. 모텔에서 떠밀리듯 퇴실하고 싶지 않다. 더는 미룰 수 없다. 유럽보다 그의 집이 먼저다. 거절하지 못할 명분이 필요하다. 키스 데이를 찾아냈던 집념으로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었다.


“이번 주말에 매장 근무야. 토요일 밤에 퇴근하고 일요일 아침에 출근해야 해. 밤에 못 만나면 이번 주말에는 못 봐. 너희 집에서 자면 안 돼?”


그가 망설인 끝에 집에 오라고 했다. 베를린 장벽만큼 단단했던 그의 철벽이 무너졌다. 나의 치밀한 전략이 통했다. 나는 연애 천재다.

앞치마, 커플 실내화, 커플 잠옷, 그리고 내 칫솔. 그의 집에 새로 갖출 물품 목록이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를 한다. 다정하게 영화를 보고 커플 잠옷을 입고 눕는다. 늦은 오전까지 게으름을 피운다. 퇴실 30분 전이라는 전화는 오지 않는다. 앞으로 펼쳐질 평범하고 행복한 주말을 그려본다.


*****

토요일 매장 근무가 끝났다. 그가 송파 경찰서 앞에서 나를 기다렸다. 그의 집은 골목으로 5분 정도 들어가야 한다. 건물 1층은 단란주점이다. 건물 뒤편 출입문으로 들어갔다. 불투명 유리로 사람의 실루엣이 보이는 오래된 화장실이 있다. 2층은 고시원처럼 방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그의 집은 3층이다. 이 건물에서는 펜트하우스인 셈이다.


"가족 말고는 네가 처음이야."


나의 방문이 예외적이라는 걸 그가 강조한다. 그가 열쇠로 현관문을 연다. 그의 취향이 드러날 공간이 궁금하다. 문이 열리자 싱크대에 널어놓은 행주가 보인다. 싱크대 옆으로 세탁기, 화장실이 줄지어 있다. 한 발자국만 내디디면 방이다. 방에는 이렇다 할 가구가 없다. 텔레비전과 작은 냉장고, 옷걸이, 매트리스가 전부다. 집에서 뭐하냐고 물어볼 때마다 누워있다고 했던 진짜 이유를 알았다. 이 방에서는 세 발자국 이상 움직일 수가 없다.


협소한 공간보다 나를 당황하게 한 건 냄새다. 문을 열고 들어갈 때부터 냄새가 났다. 신발장에서 나는 고린내, 싱크대의 젖은 냄새, 천장의 곰팡내가 나를 괴롭혔다. 허름한 모텔보다 심하다. 창문을 열고 싶지만 밤이다. 구석에서 향초를 발견했다. 분위기를 내자고 둘러대며 향초를 켰다.


“혼자 살기 딱 좋지?”

“응, 그러네.”

“빨리 씻고 자자.”


그가 서랍에서 새 수건을 꺼냈다. 건네기 전에 냄새를 맡는다. 그도 이 방의 곰팡내를 알고 있다. 세면도구를 챙겨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 문은 미닫이다. 한 평 남짓한 공간에 변기와 세숫대야, 수도꼭지가 전부다. 샤워를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다. 옷을 벗을 때 팔다리가 화장실 벽에 부딪힌다. 쪼그리고 앉아서 물을 뿌린다.


낡은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고 그와 누웠다. 천장 구석에 핀 세계지도 모양의 곰팡이가 보인다. 곰팡이는 자신의 영역을 성실하게 확장해온 것 같다. 어쩌면 이 집의 실소유주일지도 모른다. 그가 집을 두고도 강원도, 춘천, 홍대로 빙 둘러 다녔던 이유를 알았다. 왜 여름휴가에 욕심을 냈는지, 왜 서울에 올라온 어머니를 누나 집으로 보냈는지도.


방문을 닫으니 쾨쾨한 냄새가 더욱 진해진다. 그 냄새는 행거에 걸린 옷에 스며들고 있었다. 그의 옷에서 나던 묘한 냄새의 정체다. 에어컨이 털털거리고 옆집의 휴대폰 진동 소리가 들린다. 예민한 사람은 쉽게 잠들 수 없는 환경이다. 2분 안에 잠드는 그의 능력은 생존을 위한 생물학적 진화였다. 오늘 밤은 빨리 잠드는 게 상책이다.


*****

아침이 되기를 기다렸다. 허리가 뻐근하다. 내 방 침대가 그립다. 일어나자마자 창문을 열었다. 창문을 열어도 햇볕은 들어오지 않는다. 서둘러 샤워를 하고 출근길에 나섰다.


“이제 우리 집이 아지트가 되는 건가?”


나를 배웅해주며 그가 말한다. 그의 얼굴이 한결 편해 보인다. 어젯밤 그는 긴장해 있었다. 교무실에 불려 온 학생처럼 안절부절못했다. 내 눈길이 머무는 곳마다 의식했다. 하루가 지난 오늘, 그는 나를 좀 더 가깝게 느끼는 것 같다. 그와 은밀한 비밀을 나눈 기분이다. 애써 웃어 보이며 택시를 탔다.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그가 주말마다 집으로 오라고 하면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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