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잊을 수 있다면
“돌싱도 좋고 나이도 상관 없어요. 최대한 빨리요.”
지인들에게 소개팅을 부탁했다. 누구라도 상관없다. 이왕이면 연애 경험이 많은 남자면 좋겠다. 연락을 자주 하고 집에 데려다주고, 다정한 말을 해주는 사람이면 좋겠다. 매력적이지 않아도 보편적인 남자였으면 좋겠다.
그를 만나기 전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 통제 가능하고 예측할 수 있는 일상으로 복귀하고 싶다. 누군가 내 감정을 좌지우지하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신나지도 설레지도 않지만,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기분으로 하루를 보내면 된다.
혼자서도 괜찮은 인생을 살 수 있다. 대학생 때부터 스스로 앞가림을 했다. 제법 이름 있는 대학을 다니고, 매 학기 장학금을 받았다. 과외로 용돈을 벌고, 마지막 학기에 취직했다. 스물세 살 때부터 경력을 쌓고, 통장 잔고를 직접 관리해왔다. 시간이 남을 때는 동호회 활동을 하거나 자기 계발을 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면 된다. 주말에는 마라톤 동호회에 가입하고, 미국 드라마 청취 수업을 들을 것이다. 외롭고 심심할 때도 있겠지만, 대체로 평온할 것이다.
하루가 지났다. 그에게서 연락이 없다. 이별마저 뜨뜻미지근한 걸까? 이틀이 지났다. 휴대폰을 자주 들여다보게 된다. 여전히 연락이 없다. 그의 침묵은 나를 화나게 한다. 그는 일상으로 복귀했는데 나만 싱숭생숭한 걸까? 그동안 연애를 하긴 했던 걸까? 허탈하다. 3일째에도 휴대폰은 조용하다. 침묵하는 그가 원망스럽다. 내뱉지 못한 말들을 쏟아붓고 싶다.
-오늘 저녁에 볼래? 집 앞으로 갈게.
오후에 연락이 왔다. 그가 동굴에서 나오는 데는 3일이 걸렸다. 뭐라고 변명할지 궁금하다. 지금이 아니면 이 답답함은 풀리지 않을 것이다. 호기심이 자존심을 이긴다.
늦은 저녁, 집 앞 커피숍에서 그를 만났다. 안 그래도 마른 그의 얼굴이 수척하다. 광대뼈가 도드라져 보인다.
"잘 지냈어?"
그가 만나자마자 내 손을 잡는다. 예상치 못한 스킨십이다. 당황스럽다. 마치 헤어진 적이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차가운 표정으로 뿌리쳐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난 잘 못 지냈는데... "
내가 아무 말이 없자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잘 지내지 못했다는 그의 말은 나에게 묘한 쾌감을 주었다. 포커 페이스인 그의 속마음을 들여다본 기분이다.
커피숍의 구석 자리를 찾아 마주 앉았다. 그가 내 얼굴을 바라본다. 눈길로 내 얼굴을 쓰다듬는다. 표정으로 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커피가 나오자 그가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 준비해온 말을 들려주었다.
"나는 여자를 많이 만나보지 못했어. 대학교 1학년 때 고백했다가 차이고, 그 뒤로는 먼저 고백한 적이 없어. 몇 번의 연애는 여자가 먼저 고백해서 시작됐고, 관계에 늘 수동적이었어. 2년간 사귄 여자 친구가 있었어. 한 달에 두세 번 만났고, 이직으로 바빠져서 소홀하다가 차였어. 그게 4년 전이야. 그 뒤로 소개팅은 종종 했지만 세 번 이상 만난 사람은 없어. 내가 먼저 연락한 적이 없거든. 나는 느리고 무뚝뚝한 남자니까 그걸 알아주기 바랐나 봐.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아. 나 이렇게 싸워본 것도 처음이야."
"2년 사귄 여자 친구가 있었다며? 그 여자 친구와 말다툼을 한 번도 안 했다고?"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어떤 연애를 했던 걸까? 무관심과 자유로 일관된 그런 연애였을까? 아무래도 좋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와 나다.
"심리 검사를 했는데 평화주의자로 나왔어. 느긋하고 잘 나서지 않고, 갈등이 생기거나 싸울 일이 있으면 도망친대. 그동안은 매번 도망쳤는데 너한테는 그러고 싶지 않아. 내가 고칠게. 내가 노력하고 변할 테니까 기회를 줘. 몰라서 그랬어. 계속 만나자."
사람이 변할 때는 계기가 있어야 한다. 그에게는 그게 나였다. 헤르만 헤세 소설의 싱클레어처럼 그가 알을 깨고 나오려고 했다.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하는 새처럼 꿈틀거렸다. 내가 그의 데미안이다.
"하나만 묻자. 우리 여행 갔을 때 왜 자꾸 미뤘어?"
“안 한 지 오래돼서 자신이 없었어. 만족시키지 못할까 봐 무서웠어.”
뜻밖의 고백이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다. 생각해본 적 없는 이유다. 오히려 내가 미안하다. 그는 나를 좋아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많이 좋아해서 어려웠던 것이다. 원석 같은 이 남자를 깎고 다듬고 싶어진다. 그래, 계속 만나보자. 그가 얼마나 변할지 알 수 없지만, 변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2년 사귄 여자 친구가 예뻐, 내가 예뻐?”
내가 물었다. 화해의 물꼬다.
"네가 훨씬 예뻐. 비교도 안 돼."
그는 내가 터놓은 물길을 잘 따라왔다. 눈을 동그랗게 뜨는 그가 귀엽다. 웃음이 난다. 마음이 풀렸다.
커피숍을 나와 그가 집 앞까지 데려다줬다. 미리 봐 두었던 장독대 옆 약속의 땅에서 서로를 마주했다. 그가 내 볼에 가만히 손을 가져다 댄다. 내 머리카락을 천천히 어루만지고, 허리를 감싼다. 떨린다. 다정한 스킨십이다. 우리는 한참 동안의 포옹으로 서로의 온기를 느꼈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키스했다. 그의 입술이 가늘게 떨린다. 화해 후의 안도감과 나를 찾은 기쁨이 느껴진다. 내가 원하던 키스다.
*****
“호캉스 갈까?”
그가 서울 시내 호텔에서 짧은 휴가를 보내자고 한다. 자발적으로 검색한 건지, 조력자가 있는지 알 수 없다. 마음에 드는 의견인 건 확실하다. 그가 수영장이 딸린 홍대의 호텔을 예약했다. 1박에 5만 원짜리 모텔도 괜찮다고 했지만, 그가 호텔을 고집했다.
저녁은 연남동의 기사 식당에서 불고기 백반을 먹었다. 소주를 시키지 않는 모습이 새롭다. 일찍 뻗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연트럴 파크를 걷고, 인디 밴드의 노래를 들었다. 오픈 바에서 병맥주를 마셨다. 금요일 밤이라 홍대 앞의 분위기가 절정이다.
"이제 들어갈까?"
밤 10시다. 인파를 벗어나서 은밀한 공간으로 들어가기에 적절한 시간이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홍대의 전경이 내다보이는 호텔 방에서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장거리 운전도 하지 않고, 소주도 마시지 않은 그는 젊고 건강한 남자였다. 우리의 케미는 잘 맞았다.
그는 게이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