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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바람 Jan 25. 2019

서른여덟, 6개월 만에 결혼하다 #6

오케이, 여기까지

중학교 때부터 남부터미널 근처에 살았다. 터미널 근처에는 모텔이 많다. 모텔마다 ‘대실 2만 원, 숙박 5만 원’이라는 간판이 있다. 나는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큰 방이 왜 숙박보다 싼 걸까? 조금 더 커서야 대실이 ‘큰 방’이 아니라 ‘대여’라는 뜻인 걸 알았다.


대실은 독특한 숙박 문화다. 한국의 비싼 집값은 자녀들의 독립을 방해한다. 미국 드라마에서는 남자가 여자를 자신의 아파트로 데려가는 장면이 흔하다. 한국에서는 집에 부모님이 계신다. 연인들이 모텔로 가는 이유다. 집이 엄해서 외박을 못하는 경우에는 대실을 한다. 모텔은 연인들의 사적인 공간이다. 편하게 누워서 영화를 보고, 마음껏 안고 키스를 한다. 서로를 자유롭게 만지고 느낄 수 있다.


연애를 시작할 때 그가 혼자 산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우리가 모텔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의 자취방에 입성할 날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 날은 오지 않았다. 자취방보다 여행이 먼저였다. 강원도 여행은 우리가 처음으로 함께 보낸 밤이다. 그 밤이 허무하게 지나갔다. 그는 나의 연애 공식과 시나리오를 번번이 비껴간다.


*****

“이번 주말에 춘천 가서 닭갈비 먹을래?”

며칠을 고민한 끝에 내가 말했다.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스킨십은 중요한 문제다. 내 몸이 그에게 반응하는지, 우리의 케미가 맞는지 확인해보고 싶다. 그건 연애에서도, 결혼에서도 중요하다. 당일치기로 가서 대실을 하면 된다. 모텔에서 영화를 보자고 할 생각이다. 이번 여름은 심각하게 더우니까 핑계가 그럴듯하다.


금요일 저녁에 그의 아는 형과 셋이 저녁을 먹었다. 그 형은 서글서글하고 사교적이다. 무엇보다 그의 답답한 성격을 잘 알고 있다. 그 형은 우리의 연애에 대해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구구절절 옳은 말을 했다. 그 형이 뭔가를 얘기할 때마다 그가 움찔했다. 짚이는 게 있는 듯하다. 반성의 기미가 보인다.


“내일 춘천에 놀러 간다고? 춘천 멀어. 하루 자고 와.”


사이다 같은 발언이다. 그 형이 큐피드처럼 보인다. 3차를 가자는 걸 거절하고, 우리는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그가 헤어지기 전에 머뭇거린다.

“내일 자고 올까?”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 형이 그를 바른길로 인도한 것이다.


*****

일주일 만에 두 번째 여행이다. 점심 시간이 지난 늦은 오후에 춘천에 도착했다. 검색해둔 호숫가 옆 닭갈비 집으로 갔다. 운치가 있다. 닭갈비는 서울에서도 먹을 수 있지만, 호수를 보면서 먹을 수는 없다. 서울을 벗어나니 공기가 좋다. 그런데 햇볕이 뜨겁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걸어 다니는 사람도 드물다. 해가 떨어질 때까지 야외 활동은 무리다. 우리는 호텔로 갔다.


그가 예약해둔 호텔이 강원도청보다 높은 곳에 있어 도시 전경이 내다보인다. 한옥 대문을 통과하니 큰 뜰이 나온다. 야외 예식을 해도 좋을 만큼 탁 트인 공간이다. 호텔의 시설은 오래됐지만, 관리가 잘 되어 있다. 우리 방은 1층이다. 한낮이라 커튼을 쳐도 밝다. 그가 텔레비전을 켰고, 나는 그의 옆에 누웠다.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봐. 우리 낮잠 잘까?”


일주일 만에 같은 상황이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기로 한다. 대실이 아니라 숙박이다. 시간은 많다. 나란히 누워 손을 잡았다. 점심을 먹은 후라 나도 금세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오후 6시다. 바로 저녁을 먹기에는 속이 더부룩해서 야간 수목원에 갔다. 입구에 들어서자 오페라 가수가 뮤지컬의 주제곡을 부르고 있다. 데이트에 어울리는 노래다. 그와 다정히 손을 잡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걷는다. 저녁이라 선선하다. 천천히 걸어서 수목원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작은 수목원이라 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네에 앉아 수목원을 내려다본다. 평화롭다. 모든 게 순조롭다.


저녁은 명동에 가서 숯불 닭갈비를 먹었다. 점심엔 철판이고 이번엔 숯불이다. 하루에 두 번 닭갈비를 먹는다. 호텔로 돌아오니 밤 10시다. 기다리던 시간이다.


“우리 내일 아침에 할까? 6시에 일어날게. 약속해.”


그가 씻지도 않고 침대에 누우며 말한다. 지난주와 같은 패턴이다. 서운하다. 낮에는 밤을 기다리고, 밤에는 다시 아침을 기다리라고 한다. 뒤척이며 새벽 6시를 맞았다. 그가 약속한 시간이다. 조심스럽게 그를 만졌다. 하지만 그가 내 손을 밀어내고 돌아눕는다.


"나 더 잘래. 8시에 깨워줘."


나를 밀어내는 그의 손길이 내 심장을 할퀸다. 다정하려고 애쓰던 마음이 순식간에 차가워진다. 모든 게 확실해졌다. 그는 나와 사랑을 나눌 생각이 없다. 남녀가 두 번이나 여행을 와서 아무 일 없이 돌아간다는 것은 이성 관계가 아니라는 의미다. 내가 그에게 성적으로 매력이 없거나 그가 너무 말라서 성욕이 없는 것이다. 그는 무성욕자가 분명하다. 발기부전이거나 게이일지도 모른다. 내가 원하는 사랑은 플라토닉 러브가 아니다. 사랑은 스킨십이다. 우리 관계는 여기까지다. 자는 그를 뒤로하고 방에서 나왔다. 뛰쳐나왔다는 표현이 맞다.


춘천 시내는 고요하다. 이른 아침이라 길가에 사람이 없다. 걷다 보니 춘천역이다. 몸도 마음도 나아갈 곳이 없다. 기차를 타고 혼자 서울로 돌아가고 싶다. 그에게서 멀리 떨어지고 싶다. 하지만 회사 차를 반납해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 서울까지 같이 가야 한다.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하다. 싸우더라도 서울에서 싸워야 한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문을 연 김밥집을 발견했다. 허기가 느껴진다. 김밥 한 줄과 라면을 시켰다. 그와 만나면서 다이어트를 했던 지난 두 달이 스쳐간다. 그 시간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단무지까지 모두 먹어치운다. 배고픔은 이제 끝났다.


호텔 방문을 열었다. 오전 8시다. 내가 들어오는 소리에 그가 깬다. 자세히 보니 옷을 갈아입었다. 혹시 내가 나가자마자 일어났던 걸까? 아니면 내가 나가기를 기다렸던 걸까? 알 수 없다.


"산책하고 왔어?"

"응."


그의 질문에 짧게 대답한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 짐을 싼다. 원래대로라면 자전거를 타고 점심을 먹은 후에 올라가기로 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는 헤어질 거니까.


"점심은 서울 가서 먹을까?"


그가 이상한 기류를 감지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차에서는 잠만 잤다. 정말로 잠이 들기도 했고, 눈을 감고 자는 척하기도 했다. 그는 라디오를 들었다. 서울까지 길고 지루한 시간이었다. 회사 차를 주차장에 반납하고 그에게 키를 건네받았다. 이제 볼일은 끝났다.


“난 별로 배 안 고픈데. 우리 커피숍 가서 얘기 좀 할까?”


나는 아침을 먹었지만, 그는 공복이다. 배고픔, 그것은 내가 그에게 주는 작은 형벌이다. 나는 그에 대한 애정을 철회했다. 그의 기분이나 몸 상태가 더 이상 내 관심사가 아니라는 뜻이다.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기고 어색하게 마주 앉았다.


그도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고 있다. 내 눈치를 살피며 화난 일이 있냐고 묻는다. 나는 말없이 찻잔을 만지작거린다. 그의 가슴에 비수를 꽂고 싶다. 내가 받은 상처를 고스란히 돌려줄 생각이다. 평온한 그의 표정에 파장을 일으키고 싶다. 작정하고 내 안의 말을 쏟아낸다.


"내가 성적으로 매력이 없니? 아니면 스킨십을 안 좋아해? 어느 쪽이든 나는 이런 식으로는 연애할 수 없어. 너 오늘 아침에 나 밀어냈지? 그때 내 기분이 어땠을 거 같아? 내가 만지는 게 싫어? 그러면 연애를 하지 말았어야지. 강원도 여행은 처음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어. 장거리 운전에 힘들고 피곤했겠구나, 주말에는 12 시간씩 자던 사람이니까 여행을 와서도 늦잠을 자는구나 했어. 그래서 두 번째 기회를 줬잖아. 너한테는 그 기회가 우습니? 내가 너한테 목매는 것처럼 보여? 너한테는 아직 기회가 많고, 나한텐 네가 마지막인 것처럼 보이냐고! 너 만나면서 혼자 연애하는 기분이었어. 이제 그만하자. 이해하고 기다리는 거 지친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그가 내 뒤를 서둘러 따라왔다.


“미안…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어. 그런 기분 느끼고 있는 줄 정말 몰랐어. 내가 잘못했어. 데려다줄게.”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혼자서 택시를 탔다. 그가 택시 문을 열고 같이 타려고 했지만, 문을 닫고 출발했다. 눈물이 쏟아지기 직전이라는 걸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서럽다. 자존심이 상한다. 블랙박스가 보고 있지만 상관없다. 울고 싶으면 마음대로 울 것이다.


집에 도착해서 머리가 멍해질 때까지 울다가 잠이 들었다. 자다 깨서 휴대폰을 보니 늦은 밤이다. 그에게서는 문자 한 통 없다. 이별에도 수동적인 그의 태도에 화가 난다. 그래, 결국 나 혼자 연애한 거구나. 연락도 이별도 나 혼자 했네. 그동안 잘 참았다. 이만하면 할 만큼 했어. 연애고 결혼이고 다 그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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