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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바람 Jan 22. 2019

서른여덟, 6개월 만에 결혼하다 #4

지금 키스하러 갑니다

사귀는 게 어렵지 키스는 쉽다. 데이트 코스에 밀폐된 공간이나 어두운 장소를 끼워 넣으면 된다. 영화관의 커플석, 자동차 극장, 멀티방, 노래방 등 레퍼토리는 다양하다. 타이밍은 알아서 찾아온다. 조용하고 어색해지는 순간이 그때다. 데이트 중에 타이밍을 잡지 못했어도 괜찮다. 집 앞에 마지막 기회가 있다. 집까지 바래다준 남자 친구의 키스를 마다하는 여자는 드물다.


키스는 연애의 중요한 관문이다. 좋아하니까 키스를 하고, 키스를 하면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마음이 먼저인 경우가 있고, 몸이 먼저인 경우도 있다. 선후 관계가 되었든 인과 관계가 되었든 키스는 연애의 패키지다. 연애하면 키스가 따라온다. ‘사귀자’라는 말에는 ‘너와 키스를 하고 싶다’는 뜻이 포함된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의 내 연애 상식으로는 그랬다. 그와 키스하는 데 꼬박 한 달이 걸렸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첫 키스를 향한 나의 치열한 노력에 대한 고백이다.


사귀기로 한 후에도 그는 달라지지 않았다. 하루에 한두 번 연락하고 일주일에 한 번 만났다. 토요일에 만나면 일요일은 집에서 쉬었다. 일요일에 만나기로 하면 토요일은 연락하지 않았다. 주말에 하루는 쉬고 싶어 하는 눈치다. 나 역시 사귄다고 해서 주말 내내 붙어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삼십 대의 연애는 이십 대의 연애와는 다르다. 일상과 연애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날씨가 좋은 일요일, 우리는 한강에서 커플 자전거를 타기로 했다. 반포 한강 지구에서 시작한 라이딩은 잠실 종합운동장을 찍고 돌아오는 두 시간짜리 코스가 되었다. 뒷자리에서 쉬지 않고 페달을 밟았더니 허벅지가 터질 것 같다.


내가 생각한 커플 자전거와는 다르다. 나는 한강을 배경으로 데이트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자전거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달리다가 벤치에서 쉰다. 다시 힘을 내서 달리다가 강가 계단에 앉는다. 멀리 남산 타워를 바라보다가 그의 어깨에 살포시 기댄다. 눈이 마주치면 그의 입술이 다가온다. 이게 내 시나리오다. 하지만 그는 토요일에 푹 쉬었는지 멈추지 않았다. 우리가 나눈 대화는 “오르막이야, 힘내.”, “내리막이야, 페달 밟지 마.” 정도다. 두 시간 동안 한 번 쉬었다. 그는 생각보다 체력이 좋다. 뒤에서 바라본 그의 등은 의외로 넓다. 수영을 해서 그런지 어깨가 발달했다.


상체를 숙일 때 보이는 빗장뼈나 티셔츠 속으로 언뜻 보이는 날개뼈 라인은 시선을 멈추게 한다. 만져보고 싶다. 손가락으로 빗장뼈와 날개뼈를 가만히 쓰다듬는 상상을 한다. 나란히 누워야만 자연스럽게 만질 수 있는 부위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오겠지만 오늘은 아니다.


그의 가방에는 글로브와 야구공이 들어있다. 자전거를 타고 캐치볼을 하기로 했다. 건전하다. 그는 밝은 곳으로만 다닌다. 캠퍼스 커플이 된 기분이다. 자전거 대여소에 도착하자 소나기가 내린다. 일기 예보보다 한 시간 빨리 쏟아진다. 캐치볼을 하지 않을 이유가 생겨서 좋다. 우산을 같이 쓴다. 내 어깨가 젖을까 봐 우산을 내 쪽으로 기울여준다. 캐치볼보다 낭만적이다.


고속버스터미널역에 있는 백화점에 갔다. 비가 와서 그런지 사람이 많다. 그는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한다. 한참을 돌고 돌아 조용한 벤치에 앉았다.


“저녁 뭐 먹지?”


저녁 시간까지는 한참 남았지만, 마땅히 할 게 없다. 서로 좋아하는 메뉴를 이야기하며 맛집을 검색한다. 다행히 우리는 식성이 비슷하다.


“교대 곱창 어때?”


그가 곱창을 먹자고 한다. 교대에서 우리 집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다. 혹시 집에 데려다주려고 그러는 걸까? 집 앞에서 우산을 쓰고 키스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첫 키스로 손색이 없다. 오랫동안 기억될 명장면이다.

이른 저녁이라 식당이 한산하다. 접이식 창문이 모두 열려 있다. 곱창이 익는 소리에 빗소리가 더해진다. 음악 대신 분위기가 흐른다. 다른 때는 1차에서 끝났지만, 오늘은 시간이 충분하다. 2차를 생각해서 볶음밥은 시키지 않았다. 그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계산을 했다.


“계산 언제 했어? 오래간만에 곱창 잘 먹었어. 남부터미널역까지 데려다줄게. 집이 거기서 가깝다고 했지?”


일곱 시도 안 된 시간인데 집에 가자고 한다. 1차를 사면 2차를 가자고 할 줄 알았는데 내가 틀렸다. 시나리오와 다르게 흘러간다. 그는 시간과 상관없이 배가 부르면 집에 가는 걸까? 소주를 마셔서 졸린 걸까? 어느 쪽이든 그가 왜 여태 혼자였는지 알겠다. 허무하다.


“집에 가면 꿀잠 잘 것 같아.”


남부터미널역 앞에서 그가 해맑게 말한다. 눈치가 없다. 그래, 자라 자. 내일 아침까지 푹 자라. 집에 들어가는 길에 빵과 아이스크림 한 통을 샀다. 마음도 고프고 배도 고프다. 이럴 줄 알았으면 볶음밥 시킬걸.




“포장마차 좋아해? 강변역에 닭똥집이랑 꼬막 맛있는 집 있는데... ”

돌아온 토요일에는 강변역 포장마차촌에 갔다. 데이트할 때마다 새로운 시도를 하는 건 좋다. 노력이 엿보인다. 열 개가 넘는 포장마차가 줄지어 있다. 모처럼 보는 풍경이다. 그중 세 번째 집이 그가 가본 데라고 했다.


“마음껏 시켜도 돼?”

몇 번의 경험으로 2차는 포기했다. 1차에서 끝날 거라면 안주라도 실컷 먹기로 한다. 배고픈 데이트는 그만하고 싶다. 꼬막, 닭똥집, 어묵을 시켰다. 참았던 식탐을 드러내자 그가 놀란 눈치다.


“소맥 먹을까?”

2차를 안 갈 거라면 1차에서 빨리 취하는 게 낫다. 닭똥집에 깔려 있던 은박 포일이 구멍날 때까지 싹싹 긁었다. 오랜만에 포만감이 느껴진다.


“한강 걸을래?”

그가 말한다. 강변역에서 한강까지는 멀다. 지하철을 타고 잠실역으로 갔다. 돗자리를 든 사람들의 행렬을 따라가니 한강이 나온다. 한강에는 사람이 많다. 우리는 벤치에 앉아 사이클족을 구경한다. 아직 밝다. 그가 나를 지그시 바라본다.


“너무 밝고 사람이 많네. 어두운 데를 찾아야겠어.”


그가 중얼거린다. 정신이 번쩍 든다. 그가 마침내 올바른 마음을 먹은 것이다. 어두운 곳. 어두운 곳을 찾아야 해. 벤치에서 일어나서 걷기 시작했다. 내 걸음이 빨라진다. 어디가 좋을까? 나무 뒤? 화장실 옆? 엘리베이터 옆 계단? 나는 두리번거리며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는데 그는 느긋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지 않고 태평하게 직진한다. 세상 급할 것 없어 보인다. 길이 넓고 환해진다. 너무 쉽게 지하철역이 나온다. 오늘도 틀렸다.


-내일 저녁 같이 먹을래?


헤어지고 집에 들어가는 길에 내가 먼저 문자를 보낸다. 우리는 주말에 이틀 연달아 만나본 적이 없다. 내가 그의 집 근처로 가겠다고 했다. 그를 배려하는 척했지만, 목적은 따로 있다. 그는 혼자 산다. 내일 만나서 키스를 할 생각이다. 집 앞까지 왔는데 차라도 한 잔하자고 하겠지. 자연스럽고 완벽한 계획이다.


일요일에도 비가 왔다. 우산 색깔에 맞춰서 옷과 가방을 고르고 집을 나섰다. 그는 추리닝에 야구 모자다. 데이트 복장으로 나온 내가 무색하다. 그가 동네를 구경시켜준다. 식당이 제법 많다. 쌀국수, 돼지갈비, 초밥 등 선택의 폭이 넓다. 그가 초밥을 추천한다. 초밥집은 동네 맛집인지 빈 자리가 없다. 십 분 정도 기다린 후에 자리를 안내받았다. 회덮밥과 모둠 초밥, 소주를 시켰다. 초밥은 입에서 녹고, 고추장은 달큼하다. 소주도 몇 잔 마셨다. 배부르고 기분이 좋다. 날도 적당히 어둑하다.


“저 건물 3층에 살아.”


초밥집에서 나와 골목을 걷다가 그가 말한다. 1층에 주점이 있는 작은 건물이다. 그의 초대를 기대했지만,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라면도 좋고 커피도 좋은데 아무것도 권하지 않는다. 우리는 계속 걷는다. 그의 집이 멀어진다. 가락시장역까지 한 정거장 거리를 걸어간다. 지하철역이 나왔다. 오늘도 실패다.




“명분이 없다 아입니까, 명분이.”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 나온 대사다. 연애하면서 키스가 이렇게 안 풀린 건 처음이다. 내 계획은 완벽했지만, 그는 눈치가 없다. 키스 원정대로 나섰으나 입술을 찾지 못하고 돌아온 기분이다.그는 에둘러 표현하면 알아듣지 못한다. 남은 건 정공법이다. 키스할 명분을 찾는다. 적당한 사례를 찾아 인터넷을 뒤진다. 마침내 구차하지만 붙들고 싶은 이유를 찾았다.


2월 14일은 밸런타인데이, 3월 14일은 화이트데이, 4월 14일은 블랙 데이, 5월 14일은 로즈 데이. 그리고 6월 14일은 키스 데이다. 생소한 기념일이지만 상관없다. 명분만 있으면 된다. 영화와 드라마의 키스 장면을 캡처해서 그에게 보낸다.


- 6월 14일이 키스 데이래.

- 아, 키스가 하고 싶었어? 밀린 것까지 한 번에 하자. 어두운 데를 찾아볼게.


그는 미션을 주면 적극적이다. 끌어주면 따라온다. 속만 태우던 한 달이 허무하다. 솔직하게 말할걸. 그가 적당한 장소를 찾길 바랐다.


-이번 주 토요일에 한강에서 볼까?


한강, 한강, 가락동. 그리고 돌아서 다시 한강이다. 한강이 승부처다. 한강에서 시작한 키스는 한강에서 끝낸다. 나는 비장하다. 토요일 오후에 신사역에서 만났다. 그가 돗자리를 챙겨 왔다. 대나무로 된 2인용 돗자리다. 뽀로로 돗자리가 아니라 다행이다. 편의점에서 맥주와 안주를 사서 늦은 오후의 피크닉을 즐긴다.


한강은 사람이 바글거린다. 동호회, 가족, 커플이 시끌벅적하게 봄을 만끽한다. 강아지가 뛰어다니고 체육 대회가 한창이다. 나란히 앉아서 맥주를 마신다. 적당한 대화를 나누지만 집중할 수가 없다. 오늘은 목적이 있는 데이트다. 도대체 어디에서 키스하려는 거지?


-누울까?


그가 돗자리에 벌러덩 눕는다. 나는 옷매무시를 정리하며 그의 옆에 조심스럽게 누웠다. 야외에서 나란히 누우려니 쑥스럽다. 자세를 못 잡고 뒤척이는 나에게 그가 팔베개를 해준다. 그의 심장 소리가 들린다. 내 심장도 같이 뛴다. 연애를 처음 하는 것처럼 풋풋하다. 눈을 감고 설렘을 즐긴다. 곧 그가 얕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린다. 긴장이 풀리고 헛웃음이 난다. 어디에서든 머리만 닿으면 2분 안에 잘 수 있다더니 진짜다.


그가 깰까 봐 가만히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땅거미가 깔렸다. 깜짝 놀라 그를 보니 거의 비슷한 타이밍에 깼다. 그가 나를 바라본다. 그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포개진다. 누가 보지는 않을지 신경 쓰인다. 하지만 10초면 된다. 10초만 강아지와 아이들이 이쪽으로 오지 않으면 된다. 봤어도 못 본 척해주기를 빌었다.


도톰하고 따뜻한 입술의 감촉이 오랫동안 느껴진다. 그는 말랐지만 입술은 통통하다. 우리는 장소를 옮겨 한강의 어두운 곳을 찾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밀린 숙제를 했다. 그와의 키스는 달콤한 초콜릿보다 씹을수록 고소한 현미밥에 가깝다. 질리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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